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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시냇가

무공해 자연

고향은  항상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추억의 산실이다 . 어릴적에  보았던  구불구불한 논두렁의 다랭이논이 떠오른다. 마을 저편 낙산에서 발원하여  골짜기 농토를 적시던 맑디맑은 시냇물도  생각난다.


마을 아래쪽 발치에 비포장 신작로를 내려가면  시냇가에 다다랐다.

갈수기에  여보폭 남짓하구불진 물길과  은빛모래가 인상적이었다. 몽돌자갈, 물가의 진흙벽 등 당시에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던 무공해의  맑은 시냇물이 그리워진다.


시냇가 모래톱에서는 재첩조개가 맘껏 잡히고 항상 물속에는 크고 작은 은빛 물고기들이 유유히 노닐었다.   시냇가 진흙벽 납작한  구멍 속에는 등딱지 검푸릇한 참게가 살았다.


 우리는 그곳에피래미 잡기, 모래성 쌓기, 고무신 배 띄우기와  미역감기 등 하루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시냇가는 수년마다 우리에게 새로움을 선사하였다. 홍수 등  큰 물이 지나갈 때면 물길이 크게 바뀌어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어느 해인가 구불구불한 물길이 백여 미터 다른 쪽으로 옮겨져 새로운 모래톱과 진흙벽이 생겨났다.


고향의 시냇가를 돌이켜 보면  유휴의 하천부지가 그리도 넓었다.  물론 그 후  경지정리가 실시되어 농지로 흡수되고 냇가는 일직선으로 농수로화 되었다.


예전 시냇가에는 인근 다랭이 논들을 위해 물을 가두는 보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우리 다랑이논의 보였다. 하지만 매년 장마철, 큰 물이 날때마다  나무말뚝과 토사로 축조된 보는 훼손되기 일쑤였다.  농한기인  겨울철에  보를 수리하는 것이 우리 집의 연례행사처럼 반복되었다.


여름철이 되면 이들 봇물 호수는 우리의 전용 놀이터가  되었다. 물고기도 잡고 헤엄도 치는  동심의 요람이었다.


 늦가을 시냇물이  점점 차가워지면 참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하류로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쯤이면 동네  참게잡이 아재 한두 분은

손쉽게 참게를 잡기 위해 대나무발과 움막을 냇가에 설치했다.


나는 그 설치 과정을 호기심으로  지켜본 인상적인 추억이 있다.

모래톱에 가까운 몇십보쯤 되는 냇가 물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대나무 발을 엮어 막는다.


움막이 있는 한쪽 끝은 한두 발짝쯤 터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하얀 자갈을 바닥에 촘촘히 깔아 둔다. 야밤에 이동하는 습성의

검푸른색  참게가  지나갈 때  눈에  잘  띄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 설치된 움막은 야밤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고깔형으로 만든  선사시대

 움집 그 자체였다. 이렇게 설치한 게 움막에서 하룻밤에 참게를 백 마리도 넘게 잡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시기 어느 해던가 그곳 모래톱에서는  대대적인 모래채취 공사가 있었다.  사실인 즉 모래를 채로 쳐서 사금을 채취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물론 어른들을 통하여 일제강점기에  마을건너편 낙산에서 많은 금광채굴이 있었다는 예기를  들었다.  지금도 폐광의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사금을 채취하는 다소 낯선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 가보니 하루종일

수고하여  모래를 산더미같이 쌓아 놓았지만 찾아낸 금조각은 실망스러웠다.  유리잔 속에 팥알만 한 것  몇 개가 전부였다.  


사실인 즉 우리 땅  어디에서든지  다량의 강바닥모래를  채로 거른다면 금조각 몇 개는  대부분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성이  없어 사금채취는 하지 않는 게 현실이란다.


그런데  70년대 초였는데도 그곳에서 사금채취를 하고 있었다. 어른들 대화 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금과 함께  모래를 골재로 판매할 수 있어 경제성면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사금채취는 많은 인력이 투입되는 광업이다. 내가 살았던 영종에도 금산이란 곳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사금금전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하루에 채취한 사금을 마차로 실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정도다.

사금조각을 그리 많이 채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됐겠는가. 아마도  

헐값의 인건비에 수백, 수천 명이 투입됐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일제치하의 사금채취는 우리의 자원약탈, 인력약탈이 이루어진 그 현장인 것이다.


한편  무공해이며  청정지역이던   시냇가가 사금 채취와  상류에 상업적 축사 설치 등으로  어느새  망가져 갔다.

 또한 경지정리 등 인공 수로의 설치는  내 기억 속 동심의 시냇가를 모두 지워버린 장본인이 되었다.


나는 그 후에도 추억 속 자연 그대로의 고향 시냇가와 유사한 곳을  타향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결코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자연적 무공해인 시냇가 경은 현대사회에서는 쉽게 보존, 구현될 수 없는 환경이란 것을 알아차려야만 했다.


나는  시냇가의 추억과 함께 고향 앞발치를 지나가는 비포장 신작로에도  추억이 서려있다. 5리도 안되던 등하교 길은 나지막한 고개와 산모퉁이를 몇 개나  돌아가야 했다.


비포장 흙길이었지만 차량이 다닐 수 있고 우마차가 다닐 수 있었다. 새로 난 길이란 뜻의 일제강점기 만든 신작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새마을운동 직전이라서 동네 안길  집 앞까지는 우마차 길도 안되는 거의 오솔길 수준이었다. 지금생각하니 격세지감이다.


신작로는 현대식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지방의 주요 교통망이었다.  주요 도시 간 극히 일부만 포장이 되었을 뿐 울퉁불퉁 흑바람 날리는 비포장 길들이 대부분이었다.


주요 길중의 하나가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갔다. 이렇게 신작로에 인접한 동네는 문명의 혜택이 나은 이었다.


  강원도 평창의  지인한분은 고향동네를 소개하면서 그래도 신작로가 지나가는 동네였다고 자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지방의  대부분 마을은 신작로에서  이십 리,  삼십 리 오솔길을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작로길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관계로 차후 교통수요와는 차이가 발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후 포장도로가 될 때는 고향마을보다  재너머 마을 앞 농로나 오솔길이 먼저 확장되고  포장도로가 되었다.


나의 고향마을 신작로는 가장 늦게 확장되고 포장된 것  같다.

그러나 최근에는 바로 근처로 고속도로까지 지나게  으니 그동안 빠르게 바뀌어온  고향의 주변환경에  다시한번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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