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p.13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소년의 얼굴에서
움푹 들어간 눈이 불안하면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했고,
아름다운 이마에는 총명함을
드러내는 가느다란 주름살이 잡혔으며
그러잖아도 가냘프고
여윈 팔과 손은
우아하게 축 처져 있어서
보티첼리를 연상시켰다.
p.23 한스는 작은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지 않은 채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 작은 방은 시험을 준비하면서
그가 누린 유일한 축복이었다.
이 방에서 저녁마다
피로와 졸음과 두통과 싸워가며
시저, 크세노폰, 문법책과 사전 그리고 수학 문제와 씨름했다.
끈질기고 완고하고 야심 차게 공부에 매달리면서도
때로는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즐거움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뿌듯함과 도취와 승리감으로 가득했던
신기하고 꿈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학교와 시험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고귀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며 동경했다.
p.26~27 오후에 그리스어 불변화사를
다시 한번 공부해 보려고 했는데
숙모가 산책을 하러 나가자고 했다.
그 순간 한스의 마음속에는
푸르른 잔디밭과 숲의 소리가
떠올라 흔쾌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 (중략)
그런데 이미 내려가는 계단에서
고통이 시작되었다.
(중략)
수다는 무려 15분 이상 계속되었다.
한스는 계단 옆 난간에 기대어 계속 서 있었고
그 부인의 개가 한스의 냄새를 맡고 짖어 대기도 했다.
(중략)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p. 66~73 "(목사님이 한스에게 입학 전 그리스어를 조금 배워보라고 하는 장면) 하루에 한 시간, 길어야 두 시간 정도 공부를 하면 돼. 그 이상은 할 필요 없어. 너는 지금 무엇보다 충분한 휴식을 누려야 하니까. 물론 이건 내 제안일 뿐이다. 너의 즐거운 방학 기분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중략)
목사와 한스는 문장을 몇 개만 읽고 그 문장들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번역했다. 그런 다음에 목사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가며 라틴어 특유의 정신을 매끄럽게 설명했고 누가복음이 지어진 시대와 배경에 대해 들려주었다. (중략) 한스는 마치 자신이 이번 수업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받아들여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