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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우 Jun 27. 2023

태풍, 그리고 첨성대

경주 첨성로

오전 11시 18분. 아직 배가 고프진 않다. 길 옆에 2대째 장사 중이라는 국수집이 눈에 띄었다. 경주황남빵을 몇대째 한다는 간판을 하도 많이 봐서인지 큰 믿음이 가진 않는다. 그렇다고 저 멀리 있는 교동 면옥에서 줄서면서 먹긴 싫었다. 첨성대를 가기로 마음 먹었다. 비가 온 뒤라 기온이 그리 높지도 않았다. 걸을만 했다. 


주변의 꽃들이 참 예쁘다. 중년의 남자가 꽃 좋아하는 것을 꼴불견이라 하지만, 난 뒤늦게나마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은 이 철부지 마음이 다행스럽다. 젊을 땐 왜 이런 것들을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어릴 적부터 봐왔던 그 예쁜 녹색 생명체들이 이제서야 눈에 익어 예쁘게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러 꽃들은 손이라도 흔들듯 환영해준다. 저 멀리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리고 작은 깃발 아래 몰려다니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첨성대를 마주했다. 아주 어릴 적 여기 온 듯하다. 그땐 대체 이 돌무더기를 뭣때문에 보러오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냥 친구랑 장난만 쳤고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기댈 곳 하나 없는 이 벌판에서 첨성대는 홀로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처음 첨성대를 만들자는 의견은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실용성 없는, 자칫 높은 양반들의 놀이 정도로 치부될지도 모를 이 제안을 받을려면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이겨냈을까.


좀 걷다보니 더워졌다. 임시 주차장에 차를 댄 것이 문득 후회가 된다. 걸어온만큼 더 걸어가면 경주국립박물관이다. 거기서 내 속도로 안을 찬찬히 구경해볼 셈이었으나 어느새 난 꽤 지쳤다.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허술한 듯한 그 2대째 국수집을 갈 것이다. 남들이 다 좋다는 유명 맛집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즐겨먹는 그런 음식이 낫지 않겠는가. 제법 허기도 차올랐으니 시기도 딱 좋다. 간단히 밥을 먹고 차 한 잔을 여유롭게 한 뒤에 가리라.


"혼자 오셨어요? 음... 그럼 저 쪽에 앉으실래요?"


권유의 어투지만 강요에 가깝다. 사업 도와주는 사람인데 이정도는 이해해줘야지.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콩국수 매니아로써 메뉴는 당연히 콩국수일 가능성이 컸는데 갑자기 변덕이 인다. 칼국수를 주문한다. 의아하게도 손님들이 점점 가게안을 메운다. 끝내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다. 오로지 나만 홀로 한 테이블을 차지하니 화려한 죄책감이 나를 감싼다. 1인 시대에 트렌드 중심에 있는데 여긴 왜이런 것인가.



칼국수가 나왔다. 일반적인 외형이다. 감자가 보이는 것이 굳이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까.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숟갈 떠먹어 본다. 머리에 느낌표가 떴다. 이건 보통맛이 아니었다. 젓가락으로 허겁지겁 면을 집어본다. 탄련성을 가지고 있는데 수타면이다. 싱겁게 먹는지라 국물에 간장은 넣지 않아도 되겠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대대손손을 자랑하는 경주황남빵의 광고시장에서 홀로 국수 2대를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었다니. 김치도 적절하다. 양념에 적절히 배어있지만 배추의 탄력도 가지고 있다. 고추는 내가 좋아하는 오이고추였다.



다이어트는 이렇게 또 하루를 더 미룬다. 괜찮다. 난 살이 아니라 인생의 행복을 먹은 것이다. 스타벅스엔 차를 몰고 가려했지만 가까운 거리라 걸어가기로 한다. 생각해보니 밥 먹기 전에 좀 걷기도 했고, 먹고 나서도 조금이지만 걷는구나. 이 더운날 뜨거운 걸 먹었더니 땀이 샘솟는다. 오늘따라 스타벅스 매장 안의 종소리가 정겹다.



유자민트티. 사실 메뉴는 이미 정해져있던 거였다. 최근 스타벅스 이용횟수는 유자민트티 구매 횟수와 거의 동일하다. 텀블러를 안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책을 했지만, 매장 안에서 먹을테니 매장컵을 이용하면 일회용 컵을 안써도 된다고 안도했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 책장을 넘기며 신선놀음을 할 것이다. 탑다운의 강렬한 조명이지만 오렌지색 조명이라 좋았다. 요즘은 오렌지색 조명이 참 마음에 든다. 빛의 파장이 짧은 푸른 계열은 오전에 있다면 문제 없겠지만, 잠들기 전에도 그 빛을 쐰다면 우린 쉽게 불면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 빛에는 잠들기 전에 보는 스마트 기기도 대부분 포함이 된다. 그래서 하이엔드 조명 하나를 봤다. 돌리는 형태의 스위치로 초반엔 푸른빛의 강렬한 조명이었다가 후반엔 노을빛의 은은한 조명으로 바뀐다. 인간의 입장에서 하루의 빛을 겪는 듯한 빛을 한 사이클로 잘 표현했다. 디자인도 미니멀리즘이 강조된 상단에서 하단으로 비추는 방식이라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58만원이라는 가격뿐이었다.


본래의 계획과는 달랐지만 비 걱정과는 달리 경주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우려를 가지고 일찍 출발해서 느긋한 시간을 꽤 행복하고 알차게 보냈다. 거창한 의미가 없어도 단편마다 만족과 행복이 쌓으면 좋은 하루가 아닌가. 그렇다. 난 꽤 행복한 하루를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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