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 말한 모든 것을 지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앎과 행함의 지행(知行)과 말과 행함의 언행(言行)이 일치(一致)와 합일(合一)을 이뤄야 한다고 합니다. 삶에 있어 값진 덕목이니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는 거겠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이 꼭 들어맞으며 하나 되는 현상을 일컬어 조화 이루거나 화합한다고 합니다. 결합이나 융합된다고도 하지요. N극과 S극이 붙는 것처럼 같은 성질을 밀어내고 다른 성질을 취함은 자기에게 없는 부분을 채워주는 소중한 존재와의 만남과 같습니다. 만남도 실행이에요. 내게 꼭 들어맞는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은 실행입니다.
도(道)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서 찾는다. 일은 쉬운 데 있는데 어려운 데서 구한다.—맹자ㆍ이루상
나의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나의 발아래, 내가 딛고 서 있는 곳이 나의 길이에요. 매우 가깝죠. 그런데 자꾸 멀리서 찾으며 방황합니다. 재밌는 건 실컷 방황하고 돌아와 보면 내 자리가 꽃자리임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돌아온다는 건 원래의 자리로 오늘 회귀를 뜻해요. 돌고 돌아와 보니 결국은 그 자리라는 것, 그 자리에 이전에 느끼지 못한 감사함을 느끼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겁니다. 불평불만으로 가시방석으로 느껴졌던 나의 자리가 알고 보니 꽃자리라는 건 삶의 대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경우에요. 그래서 돌아온 자리가 원래 내 자리였다고 해도 그때의 자리와 회귀한 자리는 매우 다른 성질의 것이 되어버린 거죠. 몸과 마음이 일치를 이루어 나의 인생길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길이 되는 겁니다.
인생 여정에서 내가 원하는 길을 걷고 있다면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발을 옮겨야 합니다. 마음의 나침반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고 걸음을 떼야 하죠. 내 몸과 마음이 움직일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만 바라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환상에 그치고, 몸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원하는 바를 모르면 의미 없는 행동의 나열이 됩니다. 둘 다 온전하지 못한 거죠. 그러니 마음이 원하면 행하면 되고, 몸이 가면 마음을 들여 봐야 하죠. 몸과 마음, 고작 두 개라 간단할 만도 한데 참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죽하면 약 2400년 전 맹자나 약 2500년 전 공자의 이야기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겠어요. 환경이 변하고 진화했다고 해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 속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나 봅니다.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라는 말 참 많이 듣죠? 경험을 통해 몸소 체험한 이들도 많을 거고요. 알고 보면 사실 그냥 했으면 될 일을 여러 이유로 시작하지 않은 적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일을 미룹니다. 온갖 핑계를 대가며 애써서 안 하고 있으나 마음은 불편해요. 사실은 잘 알고 있거든요. 자신이 해야 할 일이란 것을. 안 하기를 애쓰지 말고, 하려는 마음을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요.
실행의 전제조건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나침반을 따라 시동을 걸어요. 마음의 나침반은 방향을 결정해주는 비전을 가리킵니다. 비전은 자신이 추구는 바이기 때문에 깊숙이 자리 잡은 꿈과 연결되어 있죠. 자신의 내면과 친하다는 사람도 인생 지도를 그려나가는 게 수월하지만은 않아요. 하물며 내면 아이[자아]와 손잡지 않는 이들은 자기 마음의 나침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알 길이 없죠. 남들 흐름에 따라 목표는 세웠어도 나의 비전과 맞는 길인지 하나로 꿰뚫는 일이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요.
공자가 나의 도(道)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써 관통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는 "예!" 하고 대답했다. 공자가 나가고 문인들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묻자, 증자는 선생님의 도는 충서(忠恕)일 뿐이라고 했다.
—논어ㆍ이인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써 관통되어 있다’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라고 해요. 옛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하죠? 아무리 진귀한 보석이라도 꿰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장롱 속에나 보관되어 있겠죠. ‘장롱 면허’처럼 애써서 합격했으나 고생한 보람없이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슬픔, 배우기는 했으나 익히지 않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공자가 자신의 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함은 요즘 말하는 ‘연결의 힘’인데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의 요즘 버전일 것 같습니다. 개성이 각자 다른 개인들이 스스로 모이고 해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송길영 박사가 말하는 핵개인) 훌륭한 개인이 느슨한 연대로 만나 멋지게 일을 해낸 후,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가죠. 새로운 프로젝트에 임할 때 다시 만나고 또 흩어집니다. 서로의 능력을 나누고 합치는 핵개인 MZ세대가 그리 멋져보일 수 없더라고요. 불필요한 사운드가 없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건 느슨한 연대의 힘인 것 같습니다.
구슬을 하나로 꿰었다가 풀고 다른 형태로 다시 꿰어 자기 맘에 꼭 드는 모양을 찾아가는 것과 같이, 또 다른 구슬을 모아 만들고 또 만들어 쌓아가는 것과 같이, 나의 길을 만들고 또 새로운 길에 들어섭니다. 나의 꿈을 이루어 가는 길, 비전을 바라보며 목표를 단계별로 성취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로 관통한다는 일이관지를 해내는 원동력은 바로 “충서(忠恕)”입니다.
나의 본성에 충실하기! 사리사욕에 눈과 귀를 닫는 건 본성에 충실한 게 아니에요. 사람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한 맹자를 떠올려 봅니다. 자신이 바로 섰으면 선한 연결의 힘을 믿어 보는 거죠. 중요한 건 자신이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내 마음을 충실히 들여다보며 원하는 바를 찾고, 그 충직한 마음으로 자신의 길 위에서 충실히 걸어 나아가는 게 찐 인생 아닐까요? 함께 할 벗이 있다면 금상첨화이고요.
헤아려 생각하기! 내가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들을 때 타인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 자신의 손길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인간이 본래 타고난 선한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면 헤아려 생각할 수 있죠. 이게 바로 ‘서(恕)’입니다. 내 마음이 흘러감을 인지한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나 자신도, 타인도, 나의 꿈도, 함께 이뤄나갈 비전도, 충과 서로 해나간다면 언젠가 하나로 관통되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을까요?
일은 수수께기가 아닙니다. 일은 OX게임이 아니니 잘하든 못하든 일단 하면 됩니다. 시작하려는 마음 먹기가 어렵지 막상 하면 어떻게든 굴러가잖아요. 어떻게 보면 일은 시작하지 않은 갈등의 상태가 가장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 속에서 일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어 가기도 하고요. 생각만으로 벅차 차마 시작하지 않은 일이 왕왕 있잖아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어도 과정 가운데 헤아려 생각하고 피드백도 받으며 고칠 건 고치고 보탤 건 보태면 됩니다. 하고 또 하여 완성도를 높여가면 됩니다. 나의 길은 내 발이 위치한 곳, 일도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씩 해나가면 됩니다.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을 따라 일을 하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아니, 어려움을 맞닥뜨리더라도 하나씩 풀어나가면 됩니다.
-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 일의 과정에서 헤아려 생각하고 피드백 받으며 고칠 건 고치고 보탤 건 보태면 된다
- 하고 또 하여 완성도를 높여가면 된다
- 나의 길은 내 발이 위치한 곳, 일도 내가 있는 곳에서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을 따라 일을 하면 어려울 게 없다. 아니, 어려움을 맞닥뜨리더라도 하나씩 풀어나가면 된다.
질박하고 단순한 진리를 다시 꾹꾹 눌러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