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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젤 May 17. 2022

내가 죽어야 살아나는 음악

추천곡: 라비던스 - <He lives in you>

 내가 처음 음악을 접한 건 6살 무렵이었다. 같은 유치원 친구가 동요 <동물농장>을 치는 걸 보고 부러운 마음에 피아노 학원을 등록한 게 내 음악의 시작이었다.


 비록 전공자가 아닌 아마추어일 뿐이지만, 10년 이상 피아노를 친 사람으로서 내 음악 인생도 나름의 터닝포인트가 존재한다. 나의 경우 고등학생 때 찬양팀에 들어간 게 음악적인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동안 독주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찬양팀을 통해 합주의 언어를 배우게 되었다.


 혼자만 잘하면 되는 독주와는 달리, 합주는 다양한 악기들이 모여 합을 맞추는 연주 방식이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다양한 부분을 서로 채워주며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 그렇기에 합주는 연주자들끼리 코드와 박자를 맞추는 것 이외에도 서로의 호흡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우리 찬양팀의 밴드는 크게 다섯 개의 악기로 이뤄져 있었다. 드럼, 메인 키보드, 세션 키보드, 일렉 기타, 그리고 베이스. 이 중 나는 메인 키보드를 맡았다. 메인 키보드는 드럼, 베이스와 함께 음악의 골격을 잡아주면서도 잔잔한 곡을 연주할 때는 주역으로 나서는 파트다.


 솔로 피아노 연주자에서 메인 키보드 연주자로 새롭게 시작한 나. 그런 내가 합주를 시작한 후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너는 너무 연주를 화려하게 해'라는 거였다. 중학생 때는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욕을 먹었는데 정작 고등학생 때는 연주가 과하다는 지적을 받다니.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본격적으로 키보드를 치기 시작한 고등학생 1학년 가을부터 졸업할 때까지는 매 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로부터 5년 즈음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클래식 피아노의 화려함에 길들여져 있는 내가 클래식 피아노를 치듯 연주를 했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는 남들에게 맞추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이게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고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스타일로 연주하던 내가 조금씩 '메인 키보드다운' 연주를 해야겠다고 고민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매 주일마다 동일한 스타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데도 질려 있던 참이었고, 조금 더 좋은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때부터는 곡을 들을 때 코드나 박자에 집중하는 대신 연주자가 어떤 식으로 연주를 하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노인팅 예배팀의 <주 안에서 기뻐해>라는 곡에서, 키보드는 맨 처음 후렴에서 가온 도를 기준점으로 삼고 두 개의 음을 연주하지만, 반복되는 후렴에서는 솔~높은 도를 기준점으로 삼고 두 개의 음을 연주했다. 이런 식으로 나 스스로 분석한 것들을 노트에 적고, 그것들을 조금씩 예배 연주에 적용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연주'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갈망이 존재했다. 그래서 3월부턴가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나은 예배 반주를 하고 싶다는 내 포부에 걸맞은 선생님을 만나 화성학과 실질적인 연주 스킬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고등학생 때와 동일한 지적을 받았는데, 바로 내 연주가 너무 화려하다는 거였다.


 보통 사람들이 내 연주가 화려하다고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가 피아노 음을 많이 누르기 때문이다. 가령 C 코드를 잡을 때 남들은 '도미솔'을 잡지만, 나는 버릇처럼 2음을 추가해 Cadd2 코드를 친다. '도레미솔'을 친다는 이야기다. 남들보다 음 하나를 더 치는 셈이다.


 게다가 애드리브를 넣을 때도 다양한 음을 활용하고,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계속 움직이는 연주를 한다는 점에서 나는 확실히 화려하게 치는 게 맞다. 예를 들어 G코드를 두 마디 연주해야 한다면, 보통 기본 G코드 한 번만 연주하는 데 비해 나는 무조건 기본 G코드 한 번, 전이된 G코드 한 번으로 두 번 연주한다.


 내가 이러한, 다양한 음을 연주하고 이동이 잦은 연주를 하게 된 데의 배경은 무엇이 있을까. 선생님과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우리가 밝혀낸 내가 화려한 연주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내 안에 '내가 이 곡을 무조건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창 합주에 대해 감을 익혀가던 고등학생 때는 일렉 기타와 세션 키보드의 공석이 자주 발생했다. 하지만 우리가 연주해야 하는 곡들은 일렉 기타나 세션 키보드가 없으면 분위기가 살지 않는 곡들이 많았다. 일렉 기타와 세션 키보드의 부재는 나로 하여금 내가 어떻게 던 그들의 자리를 대신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그런 생각은 저절로 화려한 연주로 이어졌다.


 그 생각은 은연중에 내 마음에 남아 지금까지도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탓에, 지금은 일렉 기타와 세션 키보드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나는 계속 과한 연주를 이어가고 있었던 거다. 선생님은 내게 그 점을 꼭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점을 인지한다 해도, 몇 년 동안 피아노를 친 버릇이 있는데 그게 바로 고쳐지진 않았다. 매 번 동일한 이야기를 듣는데 바뀌질 않아서 나도 좀 답답했다. 결국에는 마인드 문제니까 조금 여유를 가지다 보면 언젠간 고쳐지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때였다.


 최근 <팬텀싱어> 프로그램에 나왔던 음악을 듣는 것에 빠져 있었던 나는, 알고리즘의 추천을 받아 어느 날 라비던스의 <He lives in you>라는 곡을 듣는다. 라이온킹 OST로 유명한 그 노래. 맨 처음엔 별생각 없이 듣던 노래가 정작 내게 깜짝 놀랄 서프라이즈를 선물해 줬다. 바로, 노래가 너무 완벽했다는 거다!


 라비던스의 가창력이야 말해 뭐할까 싶다. 고음부터 저음까지 꽉 채우는 화음 블렌딩에다가 에너지 넘치는 특유의 소울풀한 무대까지. 그러나 내가 라비던스의 <He lives in you>를 들으며 좋았던 점은, 노래도 노래지만 그 뒤에 깔리는 반주가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이상적인 합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내가 듣기로 <He lives in you>는 크게 다섯 가지의 악기로 구성된다. 메인 키보드, 드럼, 베이스, 일렉 기타, 세션(움직이는 Pad로 예상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건 메인 키보드의 움직임이다. 전주 부분에서 강조되는 악기는 세션이다. 세션의 움직임에 드럼이 약간씩 합을 더해 주고, 나머지 악기들은 살짝만 연주했다가 더 이상 연주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즉 전주 부분에서 세션의 강조를 위해 모든 악기들이 자신의 소리를 줄여 줬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메인 키보드가 활동하기 시작하는 건 1절부터다. "Night", 로 시작하는 존노 님의 부드러운 음색을 따라 메인 키보드는 본인의 리듬을 연주한다. 그 리듬과 세션의 흥겨우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이 1절 전체를 휘감으며 곡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1절 중간에 고영열 님이 "Ubukhosi bo khokho"를 외칠 때는 악기들 전체가 연주를 멈추며 온전히 가수의 노래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다 황건하 님의 "Wait",라는 가사와 함께 다시 키보드의 연주가 시작되며 곡의 분위기를 이끌어나간다.


 그렇게 1절 후렴인 "He lives in you"의 가사가 시작되면 메인 키보드는 원래 치던 리듬을 멈추고 부드럽게 연주한다. 애드리브도 점사분음표와 기본적인 화음으로 구성되어 화려한 연주보다는 정적인 연주에 가깝다. 이러한 연주를 통해 곡을 부드럽게 풀어 주면서도 라비던스의 노래에 집중하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드럼이 연주에 참여하며 모든 악기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간주 부근. 메인 키보드는 다시 원래 리듬을 연주한다. 그리고 간주가 지나고 2절에 들어서면서 피아노는 동일한 리듬을 연주하나 조금 더 높은 음정들을 치며 1절보다 확실히 분위기가 고조됐음을 알린다.


 다시 2절 후렴이 시작되면서 키보드는 1절 후렴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더 움직이는 양상을 보인다. 1절 후렴에는 많이 나오지 않았던 애드리브를 더 많이 연주하고, 상대적으로 가온 도 주변에 머물러 있던 음정을 높은 도 쪽으로 끌어올리며 힘찬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러면서도 곡이 E키로 키업되고, 타악기와 트럼펫 비슷한 음색의 세션이 곡을 주역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하며 키보드는 다시 가온 도 쪽으로 음정을 끌고 내려온다. 전과 비교해 확연히 바뀐 노래이니만큼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들어가는 음을 헷갈리지 말라고 한 번 쳐 주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여기서의 키보드는 자신의 애드리브를 연주하기보다 타악기의 리듬을 따라가며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곡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대망의 후렴. 베이스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고조된 E키 후렴에서 키보드는 높은 도 이상의 음정을 연주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활약해야만 하는 건 다른 악기들이다. 베이스, 드럼, 트럼펫이 더 드러나야 하는 걸 알기에 키보드는 높은음을 연주하지만 과하게 연주하지는 않는다.


 키보드가 '연주 좀 하네?'라고 느껴질 정도로 나오는 부분은 딱 마지막 후렴이다. 분위기를 전환한 후 한번 후렴을 하고, 그다음에 펼쳐지는 부분. 높은음을 연주하면서도 자신만의 리듬을 치는 부분이 딱 여기다. 높은 음역대에서 통통 튀면서도 리드미컬한 기법을 선보이는 키보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라비던스 멤버들도 이 부근에서는 서로 화음을 맞추고, 고영열 님이 "In to the water"를 부를 때 황건하 님이 이어서 바로  "He watches over everything we see"를 부르는 등 더욱 노래를 고조시킨다.


 그러다 곡의 절정과 끝이 다가왔을 "In your reflection" 파트 무렵, 라비던스 멤버들은 하나로 모이고 키보드는 언제 자기가 높은음을 리드미컬하게 연주했냐는 듯 음정을 내리고 침착하고 고정적인 연주로 돌아온다. 마지막에는 키보드를 살짝 쓸어주면서 C#m코드를 짚어 라비던스 멤버들의 "He lives in you"가 잘 들리고, 여운이 남도록 연주를 마무리한다.


 내가 <He lives in you>의 반주를 들으면서 정말 감탄했던 점은, 키보드가 자신이 확실히 연주를 해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수나 다른 파트가 강조되어야 하는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고, 텐션이 폭발해야 하는 파트에서는 화려한 연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것. 곡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분명 어려운 일이다.


 또한, 키보드가 더 좋은 합주를 위해 스스로의 기량을 뽐내지 않은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후렴만 들어봐도, 키보드 연주자는 분명히 건반을 훌륭하게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음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화려한 연주를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분명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의 연주가 죽어야지만 전체적인 음악이 사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연주한 것 아닐까.


 여태껏 내가 해본 합주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합주는 결국 여러 명이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악기들이 서로 자신이 뛰어나다면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려 하면 그건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 된다. 예를 들어, 잔잔한 곡을 연주해야 하는데 드럼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겠다고 지나치게 과한 리듬을 치면 그 곡에서 드럼만 톡 튀어나온 듯 이상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런 것처럼 합주는 나의 잘남을 뽐내기보다 우리의 음악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He lives in you>를 들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내 연주들을 되돌아보았을 때, 내가 화려하게 연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 어쩌면 그건 위에서 언급했듯 '내가 이 곡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내 자신의 오만함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됐다.


 나는 그저 키보드 연주자일 뿐인데 내가 뭐라고 남의 파트를 대신 채워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어쩌면 내가 그동안 '곡을 내가 채운다'라는 마인드로 했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듣지 못하게 하고, 정작 내가 죽어야 음악이 사는 부분에서 나를 죽지 못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피아노가 화려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이렇게 멋진 음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키보드의 건반은 제품마다 다르지만 25개부터 96개까지 다양하다. 그 건반을 몇 개 누르느냐, 어떻게 누르느냐, 왼쪽과 오른쪽 중 어느 건반을 누르느냐에 따라 곡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낼 때 그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건반을 잘 쓰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키보드 연주자일 것이다.


 아마 그동안 내가 쓰던 건반의 개수는 적어도 50개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걸 조금씩 줄여가 보려고 한다. 내가 곡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과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다른 악기가 활약해야 할 때는 그가 조명을 받을 수 있게 침잠해야지. 그렇게 모두의 마음을 모아 '하나'가 되는 연주를 할 수 있는 키보드 반주자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내가 죽어야지만 살아나는 악을 기억하며.



그런고로 들어보세요. 라비던스의 He lives in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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