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한 지도 한 달이 지났습니다. 약물 복용으로 인해 저의 삶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고 하면 "갈망이 사라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전의 저는 갈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늘 무언가를 추구했고 늘 무언가에 목말라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마치 빈 독인 것처럼, 아무리 물을 들이부어도 갈망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이 참 많습니다. 양말만 해도 서랍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부족해서 다른 서랍에 몇 개의 양말이 더 들어있지요. 양말 하나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뭐든지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가장 빠르게, 가장 눈에 띄게 사라진 갈망은 "맥주와 커피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조울증 약을 먹고 잠든 다음 날부터 그랬으니까요. 하루에 서너 잔 이상은 넉넉히 마시던 커피 생각이 전혀 나지 않더라고요. 하루에 서너 캔 이상은 너끈히 마시던 맥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술은 주로 혼자 마셨고 반주 삼아 마셨습니다. 낮술을 좋아했고요, 한 번 마시면 절제가 어려웠습니다. 그 당시엔 인정이 안 됐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습니다. 얼마 전, 약속이 있을 때 맥주를 작은 잔으로 한 잔 마셔 보았는데 이제는 한 잔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이 되고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전처럼 맥주 한 잔으로 세상의 전부를 가진 양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커피는 마셔도 되지만 굳이 일부러 마시지 않습니다. 전혀 마시지 않고도 하루를 지낼 수 있게 되었거든요. 실제로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날이 더 많습니다. 조울증 판정을 받기 전, 캡슐커피를 두 깡통이나 미리 사두었고, 추운 겨울날에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커피메이커도 두 개나 사두었습니다. 원두도 두 봉, 드립백도 두 박스나 사두었고요. 각종 머신들과 드립 도구들, 원두와 커피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오늘 아침에 커피메이커로 따뜻한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생각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사용하기 위해 일부러 커피를 마시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요. 차 한 잔 하고 싶은 감성은 제가 소장하고 있는 보이차나 홍차들로도 충분하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커피에 대한 부정적 연구 결과들도 나오고 있는데 이 참에 커피를 제 인생에서 영구 삭제할까 고민 중입니다.
하지만 매몰차게 커피를 버리기엔 커피와 함께해 온 세월이 너무 길고 정도 많이 들었네요.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었던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말이죠. 커피를 정리하려고 마음먹으니 어쩐지 쓸쓸해집니다. 제 인생의 많은 순간들을 함께해 온 다정한 벗이거든요. 아직은 미련이 남아 있어 질척거리고 있는 중입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정리할 수 있겠지요. 맥주를 떠나보내기는좀 더 쉽습니다. 술이야 말로 좋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술은 조울증을 더 악화시킬 수도 있고, 정신과 약하고도 상당히 부정적인 상호작용을 합니다. 뇌에 직접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제가 많이 의존했고 또 중독되어 있던 커피와 맥주에서 이제 해방되었습니다. 커피와 맥주가 없어도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또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해방된 노예처럼 속이 후련하고 시원하고 얽매이는 게 없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하기도 합니다.
예전의 저는 커피 한 잔에, 맥주 한 잔에 참으로 행복했거든요. 출근 전 급히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었다면 아침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요. 주말에 늦잠 자고 일어나 잠옷을 입은 채 마시는 커피는 저를 충만하게 했습니다. 맛있는 주전부리랑 맥주 마실 생각에 퇴근길은 또 얼마나 행복했게요. 피자, 치킨, 회, 햄버거, 떡볶이, 김밥, 컵라면 때로는 과자나 육포와 함께 맥주 마시는 낮과 밤은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제주도에서 마시는 맥주는 또 어떻고요. 풍경이 좋은 여행지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마시는 낮술은 그 순간을 한없이 감성적이고 매력적으로 기억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