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냥 빵은 아니되옵니다. 생크림, 버터크림, 초코크림 등 각종 크림이 잔뜩 들어 있다거나 버터를 잔뜩 바른 빵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크림이나 잼, 버터를 구비해 두고 먹을 때도 있었지요. 싸구려 크림일수록, 싸구려 버터일수록 더 맛있었습니다. 그게 저의 식성인 줄 알고 여태 살아왔습니다. 저의 피에 서양인의 피가 한 방울쯤 섞인 게 아닐까 의심도 해보았죠. 김치나 밥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크림이 겹겹이 쌓인 케이크, 치즈가 잔뜩 올라간 피자에 환장을 했습니다. 케이크나 피자 절반쯤은 한 자리에서 먹어치울 수 있었지요.
저는 요리를 일절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는 밥과 반찬을 먹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로 조리해야 하는 모든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라면도 컵라면만 먹습니다. 요리를 안 한다는 말은 곧 배달음식과 패스트푸드, 정크푸드를 무지하게 많이 먹었다는 뜻입니다. 아침은 어차피 먹을 시간이 없고, 저녁은 배달음식이나 편의점에서 파는 음식으로 해결했습니다. 회에 맥주, 파스타에 맥주, 김밥에 맥주, 컵라면에 맥주, 볶음밥에 맥주, 치킨에 맥주, 피자에 맥주, 햄버거에 맥주, 과자에 맥주, 만두에 맥주 등등을 돌아가며 먹었습니다. 제 식습관이나 취향의 문제인 줄만 알았습니다.그런데 조울증 약을 복용하고 나서 바로 저녁 식단이 바뀌었습니다.
요즘엔 우유에 고구마에 치즈, 그릭요구르트에 블루베리에 견과류, 부모님 댁에서 먹는 집밥을 돌아가며 먹습니다. 오늘은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 보았어요. 캄파뉴에 올리브오일을 찍어 먹었답니다. 홍차와 함께요. 저는 캄파뉴를 오늘 처음 먹어 보았습니다. 바게트와 비슷한 프랑스의 전통 빵이자 주식인데요, 요즘은 '건강빵'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네요. 이렇게 통밀로 만든 담백한 유기농 빵을 여태 먹어볼 일이 없었지요. 크림이나 버터가 없는 빵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으니까요. 밀가루와 설탕, 크림, 버터가 범벅되지 않으면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자극되지 않으니 저도 모르게 자극적인 음식을 찾아 먹었나 봅니다. 달고 짜고 맵고 느끼한 음식만 먹었어요. 컵라면을 먹어도 늘 물을 표시선보다 훨씬 적게 부어 먹었지요.
처음으로 먹어본 캄파뉴는 어찌나 고소하고 맛있는지요. 담백하게 맛있는 맛을 처음으로 느껴 보았습니다. 조금은 딱딱한 빵을 올리브 오일에 적셔 부드럽게 만들어 씹으면 빵에 들어있던 무화과와 어우러져 식감이 참 좋습니다. 거친 음식을 먹으니 씹는 재미도 있고요. 너무 맛있었지만 300 칼로리에 해당하는 1/4 조각에서 멈추었습니다. 맥주 대신 홍차로 하루를 마무리하니 맑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퇴근 이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습니다. 잠시 중단시켜 두었던 임용 강의를 며칠 전 다시 시작했는데요 이제 강의를 들을 예정입니다.
불균형한 뇌의 물질들로 인해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식성과 식습관이 엉망이 될 수 있다니 인간의 뇌란 참 오묘하고 신비롭습니다. 인체의 호르몬에 비하면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나약한가요. 이미 43년 동안 굳어진 식습관이 단순히 알약 몇 알로 바뀌다니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제 몸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술과 정크 푸드를 들이붓던 제 자신을 꽤 오랜 시간혐오했습니다.
조울증 약과 ADHD 약으로 인해 저는 제가 원하던 삶에 한 층 더 가까워졌습니다. 건강한 음식을 선택하고 싶었고 적당한 양의 음식을 먹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제가 원치 않는 삶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고 도저히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제가 원치 않는 것을 단호히 거절할 수 있게 된 느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낱 인간의 의지로 조절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