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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을 준비하는 짐승처럼.

정신과 상담 세 번째 기록.

by 방구석도인

1월 6일은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신과 방문 예약이 잡혀있는 날이었습니다. 방학식 날은 학생들이 급식을 먹고 하교하기에 선생님들도 일찍 퇴근하는 게 관행이지요. 그래서 이번엔 오후 두 시 방문이 가능했어요. 이번 달은 전반적으로 졸리고 우울했으며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군것질도 많이 했어요. 콘서타 복용을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학업에 유의미한 진척은 없었어요. 결국 교육학 강의는 절반도 수강하지 못한 채 기간이 끝나 버렸지 뭡니까. 씁쓸합니다. '내가 그렇지 뭐'라는 자괴감도 들고요.


6일 아침에도 소파에 한참을 앉아 있다 샤워를 하러 일어났어요. 씻는 게 너무 귀찮고 힘들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이런 시기에 방학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 저의 구원자는 정신과 약이 아니라 방학입니다. 겨울방학이 저를 구원했어요.


제가 복용하는 약 중에 "아빌리파이"라는 알약이 있습니다.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불안장애 등의 각종 질환에 감초처럼 두루두루 쓰이는 약물인데 처음 1mg을 처방받아 먹다가 새벽에 잠이 깬다고 했더니 0.5mg으로 감량되었어요. 그 탓이었을까요. 이번 달은 어찌나 졸리고 잠이 늘었는지, 어느 날은 저녁 7시나 8시에 잠들어서 다음 날 기상 시간인 아침 6시까지 주욱 잤어요(물론 정신과 다니기 전에도 이런 날들은 많았어요. 저는 전반적으로 피로감이 강한 스타일입니다). 퇴근하고 저녁을 먹으면 졸리기 시작해서 '공부해야 되는데'하며 소파에 누워 졸다가 결국엔 씻고 자는 날들의 반복이었지요. 콘서타를 먹으면 불면에 시달린다는데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이 너무 왔어요. 잠을 푹 자는 건 좋았지만 하루가 피곤한 느낌이었고, 먹고 자는 것밖에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무의미하게 느껴졌어요. 당연히 공부도 할 수 없었고요.


약 복용을 시작한 첫 달에는 입맛도 줄고 폭식이나 폭음을 안 해서 2kg이 감량되었는데 이번 달은 식욕이 증진되었어요. 폭음이나 폭식까지는 안 했지만 젤리나 건과일, 케이크 같은 달콤한 간식을 많이 먹었어요. 잘 먹고 잘 자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은 가라앉았어요. 모든 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씻는 게 제일 힘들게 느껴졌어요. 씻고 옷 입고 화장품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고 세수하고 양치하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귀찮았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짐승들이 겨울잠을 준비하는 것 같네요."


이번 약물 처방은 아빌리파이를 다시 증량해 1mg이 되었고, 항우울제인 렉사프로를 기존 5mg에서 10mg으로 증량했어요. 기존 저의 약물이 워낙 최소 용량이었다네요. 저의 요청에 의해 콘서타도 기존 18mg에서 27mg으로 증량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콘서타가 사람을 천재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고요. 저는 천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천재의 삶이 과연 좋기만 하겠어요? 할 일이 많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저는 세상 편하게 한량처럼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다만, 머릿속의 오만 잡생각들이 좀 사라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번 달은 임용 공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 봤어요. 조울증 약을 먹는 상황인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저를 억압해 가면서까지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이 됩니다. 콘서타를 먹어도 공부에 집중하고 실행하는 것이 계속 어렵다면, 어쩌면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가는 것이 힘들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리고 저의 내면과 마음, 기분, 정서에 집중하며 치유에 중점을 두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애초에 정신과에 방문한 계기가 '임용고시'였는데, 이렇게 손을 놓는다면 '지금보다 더 잘살아보고 싶다'라는 저의 결심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 같아 쉽사리 손을 못 놓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겨울잠을 자야 하는 시기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제 몸과 마음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몸과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고 억지로 저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일단 저는 다음 주에 캄보디아로 여행을 갑니다. 그때까지는 푹 쉬도록 하려고요. 그다음의 행보는 여행을 다녀와서 결정하려 합니다.


당분간은 동면의 시간입니다.

소파에서 간식 먹기,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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