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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병.

정신과 상담 네 번째 기록(2025.2.10. 월.)

by 방구석도인

저 조증이 온 것 같아요. 이번 달엔 술도 많이 마셨고요, 여행 내내 들떠 있었어요. 해외에 나가 살고 싶어서 알아보고 계획 세우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성욕도 증가했고요. 하고 싶은 것도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해외살이도 하고 싶고,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한국어 교사 자격증도 따고 싶어요. 미국과 캐나다 특수교사 자격증도 따고 싶고 ECE자격증도 따고 싶어요. 캄보디아 한국학교에 근무하고 싶어서 이력서도 넣었어요. 일이 잘 될 것 같고, 기분도 좋고, 웃음도 많아졌어요.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는 내내 생글생글 웃었고요, 사춘기 소녀처럼 별 말도 아닌데 빵빵 터졌어요. 자꾸 웃음이 나오고 자꾸 이야기하고 싶어요. 의사 선생님도 제게 그랬어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싱글벙글하네요."


의사 선생님 표정은 심각해졌어요. 약을 많이 조절해야겠다고 하시네요. 지금까지 리튬을 한 알 먹어왔어요. 리튬은 기분조절제예요. 조증을 가라앉혀 주는 역할을 하죠. 이번에는 두 알을 처방받았습니다. 그리고 항우울제인 렉사프로를 아예 빼버렸습니다. ADHD 치료제인 콘서타도 뺐습니다. 콘서타가 기분을 뜨게 한다고 합니다. 지금 방학이라 업무에 지장 없으니 콘서타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저번달에는 제가 너무 가라앉아 있어서 항우울제 용량을 늘렸었는데, 이번에는 저를 가라앉힐 수 있는 약만 처방되었습니다. 리튬 용량이 늘어난 게 조금은 슬픕니다. 조증으로 인해 아직 크게 피해본 게 없는데 꼭 가라앉혀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대부분의 조울증 환자가 그렇듯, 저 역시 조증의 상태가 더 좋습니다. 일단 기분이 좋고요, 사람 만나는 것도 좋고요, 사교성도 증대되고요,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의욕도 생깁니다. 우울감도 없고 불안감도 없습니다. 목표의식도 생기고요. 그런데 이 에너지가 오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보통 사람보다 더 깊은 우울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높이 올라간 만큼, 깊게 추락하는 거죠. 그래서 조증은 조절해야 한다고 합니다.


약국에서 약처방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저는 혼자 웃음이 났습니다. 이 밝고 환한 에너지가 이제는 곧 사라지겠지요. 오늘 밤부터 새로 처방받은 약을 먹으면 저는 다시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저의 생각은 또 어떻게 바뀔지, 저의 행동은 또 어떻게 바뀔지 저도 궁금해집니다. 해외 나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비현실적인 생각이냐고, 만약 해외 나가면 치료는 어떻게 받냐는 저의 질문에 의사 선생님은 웃으셨습니다.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라며 치료는 거기 가서 받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행복한 병, 그 이름은 (경) 조증입니다. 저의 지인들은 조증 상태의 제 모습을 좋아합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걸 부러워하기도 하고, 과감히 결단하고 추진하는 모습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이런 모습을 열정적이라고 생각해 줍니다.


이제 저는 내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리튬 두 알을 먹고 저는 어디까지 내려가게 될까요?

안전벨트 단단히 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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