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봄날의 첫 시선
개나리와 벚꽃이 나란히 활짝 핀 4월 초 어느 봄날,
공원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던 날,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늦가을,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11월의 어느 날,
그녀와 이별하였다.
인연(因緣)이란 대개 오랜 시간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짧은 만남도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녀를 알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늦가을의 공원 벤치에 앉아,
그는 하늘저편에 두고 온 무언가를 구름 속에 묻어두고,
점점 멀어지는 구름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보아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쳐다보면서,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떠올랐다,
“내가 그 소년이었나, 그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자문을 해 본다.
요즈음 도심의 공원은 참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앉기에 편안한 나무 벤치,
햇볕을 막아줄 그늘막, 잘 정리된 조경수들.
계절을 대표하는 꽃들이 늘 활짝 피어있는 산책로,
개나리와 장미로 뒤덮인 울타리.
그는 그 편리함을 최대로 누리면서 하루에 일부분을 그 공원에서 보낸다.
산책로를 따라 걷거나,
나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그저 멍하게 주변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러 보내는 것이,
그가 그녀를 알기 전, 일과를 보내는 한 부분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그의 삶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도 아니고 외로움도, 고독도 아니었다.
무의미하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그 지루한 날들이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야 삶의 두려움이 덜 할까 생각하면서도,
오늘도 어제와 같은 날이고, 그 장소, 그 공원을 찾아간다.
평일의 공원 오후는 언제나 한산하다.
그는 벤치에 앉아 아무런 감정도 없이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냥 미소를 지우곤 했다.
가끔은 싸우는 연인들을 보면서
먼 세상으로 먼저 간 아내와의 싸움을 기억하고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웃음도 지워보고,
가족과 함께인 부부를 보면서,
그 옛날 그와 가족이 즐거웠던 시간을 회상하면서 슬며시 눈을 감는다.
실천하지 못할 내일의 계획을 생각하고,
그 답답하고 두려운 얼마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는 것이
그의 하루 일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며 장소인 곳이다.
4월 초 화창한 어느 봄날,
그날도 그는 벤치에 앉아 활짝 핀 벚꽃을 보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그때,
조금 떨어진 맞은편 벤치에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물들려 져 있고,
흰 패딩 윗도리를 입고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처음 본 날이었다.
그냥 그렇게 보았고 그러려니 하며 지나쳤다.
그다음 날도 그는 매일 일과의 한 부분인 그 벤치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늘도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그녀를 보았다.
그동안에는 그리 주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그 은빛 머리카락의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녀 또한 그녀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똑같은 몇 날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중 하나는 그녀가 그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