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림이 가장 많이 말, 아 집 가고 싶다!

회사 생활이 제일 어려운 수림

by Growood

03 회사 생활이 제일 어려운 수림


출근 길에 만난 90년생 R. 겔럭시 버즈 초기 모델을 귀에 꽂은 체 흥얼거리다가 수림을 보며 인사를 건넨다.

수림이가 뭘 그렇게 신나게 들어요?라고 묻자,

지오디의 오랜 팬이라면서 "Stand up"이라는 노래가 출근송이라고 대답하는 R.

R이 덧붙인다. "기 죽으면 넌 이미 진 거야" 이 가사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출근을 해야 하루를 버텨요~~(웃음)

(참 무해한 이미지인 R도 자기만의 의식을 치르며 출근하는구나. 하아! 그나마 나만 회사가 불편한 게 아니라 다행인건가?)


수림의 회사 생활이 어려워진 건
일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갈등 관계에 놓인 특정 누군가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사람 때문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를 바라보는 방식 때문이었다.


수림은 오래도록
높은 목표는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한국 가정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공교육 받고 자란 수림 또래가 정신적 아비투스 또는 혼자서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자기효능감을 형성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옆에서 지지해 주고,
함께 비벼 주고,
필요할 때 밀어주는 산 아니면 오름이라도 있어야
야망이 비로소 현실이 된다고 생각했다.


수림은 (순진하게도) 회사가 그런 역할을 해 주는 곳이라고 믿었다.

능력이 있으면 키워 주고,
가능성이 보이면 기다려 주고,
실수하면 다시 설계할 기회를 주는 곳.

(그리고 실제로 입사 면접 당시 대표님은 직원의 인생 설계를 위해 필요로 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지지하는 진보적인 고용주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순진한 믿음이었지만
그때의 수림은 진심이었다.

회사를 이익 창출만을 위한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의 자아를 실현하는 플랫폼으로 인식했다.

그 믿음이
수림을 여기까지 데려왔다.

문제는
그 믿음이
중간관리자가 된 순간부터
조용히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수림은 그제야 알았다.
회사는
잠재력을 펼치게 돕는 후원자가 아니라,
불필요한 변수를 만들지 않는 사람을
선호하는 구조라는 걸.


회의실에서
명확한 해결책보다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합의가 더 환영받았고,
불편한 진실보다
무난한 말이 오래 살아남았다.

(아, 이건 내가 생각한 회사가 아니네.)


수림을 가장 힘들게 한 건
그 구조 안에서
유독 잘 살아남는 미꾸라지들이었다.

그날 회의는
고객 클레임 대응 건이었다.

프로젝터 화면에는
‘시스템 오류 발생 경과 보고’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상장은 리모컨을 쥐고
천천히 슬라이드를 넘겼다.

“이번 이슈는 시스템 상의 예외 상황으로 보입니다.”

상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에는 조급함도, 책임도 없었다.

“저희 팀에서 관리하던 영역은 아니었고요.
기존 프로세스상
이런 오류를 사전에 감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수림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아, XX! 그건…그 오류는 상장 팀에서 수정 요청을 미뤄두던 부분이었다)

수림 팀에서는 이미 몇 차례 위험 신호를 전달했지만

“우선순위가 아니다”라는 말로 넘어간 사안이었다.

고객에게 손실이 발생한 건 그 뒤였다.

수림은 손을 들었다.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요.
해당 오류 로그는 저희 쪽에서 사전에 공유한 자료에도 있었고—”

상장은 바로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그 부분을 인지하긴 했습니다만, 당시에는 시스템 안정성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대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보다 그 이후 단계에서 더블 체크나 백업 프로세스가 적절히 작동했다면 고객 손실까지는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수림은 상장의 발언을 곱씹었다.

(…지금 이게 우리 팀 얘기로 넘어간 건가? 아... 이게 맞냐?? 진짜???)


대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시스템 이슈도 있었고 프로세스 보완도 필요했겠네요.”

상장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전사적으로 점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수림은 확실히 느꼈다.

이 회의에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누가 먼저 말했는지,
누가 막았는지보다
어떻게 말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수림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지금 말해봐야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구조네.)

그 날의 회의는 ‘시스템 개선 필요’라는 결론으로 무난하게 정리되었다.


상장은 오늘도 다음과 같은 원칙에 입각해서 잘도 빠져 나갔다.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실수를 말하지 않는다.

책임질 문장은 피하고 공이 될 문장만 골라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기가막하게 공생을 들먹인다. ‘상황’과 ‘맥락’을 앞세워서.


그리고 그 설명은 이상하리만큼 윗선에 잘 통한다.

수림은 그 장면 앞에서
유독 몸이 먼저 반응했다.

(와… 이걸 이렇게 말한다고? 그러면서 명치 부근이 화끈거리고 숨구멍의 지름이 좁아진다.)


수림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무능함을 숨기는 방식 때문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타인의 노력을 자기 말로 번역하고,
조직의 언어를 이용해 책임을 분산시키는 태도.

그건
수림이 믿어온 세계의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수림은 또 다시 아비투스를 떠올리며 집 나간 평정심을 찾고 있다,
부정적인 언어를 줄이고,
몸짓을 통제하고,
호흡과 자세를 점검한다.

(후우~ 아 진짜 XX 이다. 수림은 아직까진 상류층의 심리자본은 획득하지 못했나부다. 스트레스 받으면 엘리트 집단과는 거리가 먼 심리를 잔뜩 담은 욕이 튀어 나오곤 한다. 욕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또는 이미 욕을 뱉은 후 수림은 중얼거린다. 아비투스, 아비투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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