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기억 속으로 (2)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나서부터는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을 거라는 생각은 앞서 나간 생각일 것이다.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얼굴의 생김새도 보잘것없었지만, 이 커다란 종기는 어떻게 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나는 거울을 보면 쉽게 좌절했다.
무뚝뚝한 입꼬리, 무뚝뚝하게 짓눌린 코, 무뚝뚝하게 찢어진 눈매, 거기에 지장이라도 박아놓은 것 같은 큰 종기.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은 아름답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겪기도 했다. 즉, 내 죽음만은 아름다울 수가 없다…….
나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자꾸만 밖을 걷는 버릇이 있었다. 호수로 향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때때로 그곳에는 봄이 오면 연잎이 둥둥 떠다녔고, 여름이 되면 짙게 녹조도 졌다. 가을이 되면 어느샌가 붉은 연꽃 같은 것이 피고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붙어 그 위를 빙상장처럼 쓸 수 있었다. 나는 그 호수에 깊은 애정을 느꼈다. 계절이 변하는 것뿐인데 어째서 자기 모습을 늘 아름답게 바꿀 수 있는 걸까? 인간이 겨울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고 여름이 되면 반소매를 입는 것 같은 걸까? 그런데 왜 나는 아름답지 않고 이 호수는 아름다울까? 다른 모든 건 아름다운데 왜 나만이 아름답지 않을까? 이 호수마저도 나에게서 멀어져 야속한 시합을 벌이는 듯이 가까이 다가와 주지 않았다. 찰랑거리는 물빛에 아스라이 비친 은색의 달, 유심히 보다 보면 동시에 투영되는 추악한 얼굴…. 그럼에도 호수가 주는 아름다움과 시각적인 미학의 낙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것에는 큰 힘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소망이 담겨 있어서, 외적으로 심리적 부담을 겪고 있는 내게 아름다움이 눈에 아른거릴수록 내부는 애타는 마음뿐이었다. 당찬 포부로서 호수를 관찰했고, 그때마다 빈번히 마음이 무너지는 사투를 벌였다. 이후,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나는 점점 이질적인 존재로 변해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 미묘한 고립이 주는 침묵이었다. 비난이 뒤섞인 비하를 떠올리다가도 그것이 진정히 내 앞에 몸을 내비치고 일렁이는 것에는 진실한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호수의 아름다움이 내게 진실로 스며드는 순간, 질투는 사라지고 숭배만이 남았다. 그러한 경외는 내 마음을 한층 투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눈처럼 쌓인 고요함이 솔바람에 쓰러질 때면, 그 자리에 은은한 향기가 퍼졌다. 그러한 순간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맑고 단단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나의 외모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속은 자기혐오와 비판으로 가득했다. 누군가 말을 걸지 않기만을 바랐고, 혹여 말을 건다 해도 대답할 마음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불편했다.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 채, 마땅히 머물러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인간이기에 존재했지만, 그 사실 외에 어떤 의미도 허락되지 않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에는 습관처럼 손가락 끝이 입술로 옮겨갔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결핍이 조금씩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인간일까?
고통은 이제 내 안에서 무언의 질서가 되었고, 그 질서 위로 어쩌다 퍼지는 온기조차 나는 경계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빛처럼 찬란한 무언가가 스쳐 간다면그것을 나는 행복이라 불러도 되는가. 누군가 끝을 밀어주는 손길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삶이라는 무대에서 막간의 전환일 뿐 의심할 이유도, 거부할 권리도 없었다.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건 세상의 무심한 온기였다. 어쩌다 길모퉁이에서 넘어졌을 때, 전혀 알지 못하는 이가 손을 내밀어오는 그 순간들. 이러한 낯선 친절은 내가 애초에 속할 수 없었던 세상이 보여주는 증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본능처럼 물러섰다. 부드러운 말투는 나를 해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질서가 있었다. 그러니 내게는 오히려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정확히 제 위치에 놓인 존재들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세계는 전쟁터이고, 그들은 각자의 명패를 단 채 전열에 선 병정들이었다. 나는 군졸, 지나가는 사람들은 병정, 세상은 칼날, 바람은 화포…….
여기까지 읽은 이들은 나를 음울하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사유의 늪에 빠진 인물로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 오해는 절반은 맞고, 나머지 절반은 빗나갔다. 나는 추상과 구조 사이를 오가며, 음울함과 나르시시즘이 기묘하게 뒤섞인 존재였다. 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자기애가, 그 다층적인 내면을 형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어쩌면 내게 남은 유일한 긍지였다.
—내 존재의 특별함.
이 소년은 수도 없이 버려지고 짓밟히면서도, 그 경험을 삶의 자긍심으로 바꾸려 애썼다. 늘 벼랑 끝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어쩌면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영웅이 빛나는 이유도 결국 그 삶이 기구하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해, 나는 또래보다 책을 즐겼기에 그런 이야기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 왕이 된 이야기나, 석가모니의 신비한 잉태는 내가 늘 탐독하던 이야기였다. 신성한 탄생이 우연이 아니라면, 내 삶의 고난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운명이 점지해주는 과정일지 모른다. 비범한 자들의 탄생이 우주가 점지해준 특별한 운명이었다면, 내 운명 또한 그 연장선에 있을 터였다.
이런 생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와 세계 사이에 벌이는 일종의 투쟁이었다.
나의 징조는 화려한 빛이나 신비로운 탄생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영웅은 늘 고통 속에서 꽃을 피우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버티는 일이 곧 살아갈 이유였다. 나는 틀림없이 인류 중에서도 독보적일 것이고, 그렇기에 하늘이 장차 거대한 인물이 될 자에게 시련을 부여한 것이라 믿었다. 그 시련은 남들과는 다른 감각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고, 나는 그 속셈을 충실히 수행하며 타인과는 다른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특별함이 정말로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남들과 다른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자아와 싸워야 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이 질문은 부정을 극한으로 몰아붙인 처절한 아우성이 아니었다. 마침내 기회를 손에 쥔 자가, 과거의 고통을 이유로 그것을 포기할 리 없듯이. 그러므로 이 원망은 억울함과 환희가 교차하는 감정이었다.
그게 나라서 참 다행이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석가모니가 탄생 직후에 뱉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은 내게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
무질서한 세상과 천상을 잇는 존재가 태어났으니, 그는 모두의 구도자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자기 위에는 지배자가 없으니, 그 존재는 스스로 ‘자재자(自在者)’가 되고, 따라서 구원받아야 할 이들은 그를 따라야 한다….
자기 위에 아무도 없는 존재가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하겠다는 말은 모순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말은 내게 거대한 힘이 되어주었다.
나는 나의 자재자였다. 내가 아닌 존재 중에서 누가 내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나를 비교했고, 자학에 물들어 있었다. 그 학대에는 모순적인 비판이 뒤섞여 있었다. 단지 내가 나를 혐오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자기애적인 성향의 최종적인 귀결.
—그것은 죽음과 연관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