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해도 내 인생
나는 최근 암 판정을 받았다. (무슨 암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0기암으로 불리지만 놔뒀다간 더 큰 병변으로 진행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직 절제술을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몇 달 전부터 갈비뼈 아래에 작은 혹이 만져지고 있다. 처음에는 아팠다가 지금은 아프지도 않은데 없어지지도 않고 있다. 심각한 병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한 번 암에 노출됐던 만큼 무서워져서 당장 병원으로 향했다. 결과는 지켜보자는 거였다.
병원 투어를 한 후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에, 알 수 없는 혹에, 정신병까지 어디 하나 온전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난 지금 번듯한 직장도 다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지 백수다. 어딘가에 이상 신호가 올 때마다 몸에 대한 걱정보다는 병원비에 대한 걱정이 먼저 들 때도 있다. 직장도 없으면서 어딘가 자꾸 고장나는 나에게 현실은 계속해서 냉혹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내 모든 것이 죽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수술 후 몸은 몸대로 에너지를 소진했고, 정신은 자꾸만 아득해져 갔다. 특히 할 일이 없는 낮에는 주체할 수 없이 자꾸만 눈이 감겼다.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거나 남자친구를 만나러 잠깐 나갈 때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외에 다른 곳에 에너지를 쏟는 것은 사치라고 여겨졌다.
술 먹는 시간 말고는 몽땅 누워만 있었던 것 같다. 몸은 망가졌고, 정신은 피폐해져가고 있다고 느꼈다. 왜 자꾸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작은 일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으니 자기효능감은 점점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내가 근 며칠 간 해낸 일이라곤 약 챙겨 먹기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무의미하다고 느끼던 순간 ‘그래서 어쩔텐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이 없어서, 몸이 아파서 당장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면접에서 백 번 떨어지고 좌절해도 살아가야 하고, 지금보다 더 큰 병에 걸리더라도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 죽을 용기가 없는 한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보니 난 삶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두고 살아가려 하고 있었다. 나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는 등 생산적인 일을 해야만 하루가 의미있게 채워지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따지면 무기력해서 하루종일 잠으로 보냈을 때는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낸 것이다. 의미 없는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내 기분 또한 다운된다. 결국 내 삶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빠진다. 나는 오늘도 무의미한 하루를 보냈어, 나는 언제쯤 정신 차릴까, 나는 언제쯤 이 우울에서 벗어날까 등의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잠으로 보낸 날도 내 삶을 이루는 많은 날들 중 하루다. 그리고 이런 하루를 보낸 덕분에 나는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게 됐다. 아무것도 안 한 하루처럼 보일 수 있어도 나를 위한 시간이 된 셈이다. 결국 나에게 무의미한 시간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조금은 편해졌다. 하루하루를 생산적인 일들로 가득 채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나를 위한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도 버리기로 했다. 우울한 나도 나고, 아픈 나도 나다. 꼭 매일매일 행복한 사람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주어진 상황을 원망할 필요도, 나 자신을 자책할 필요도 없어졌다. 내 의지로 태어난 게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내 의지처럼 되지 않으니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루하루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새 더 성장한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