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먹었더라
나는 우울증 환자이며 그로 인해 수면 장애까지 겪고 있다. 아침 식후, 점심 식후, 저녁 식후, 취침 전 총 네 번에 나눠 약을 먹어 왔고(현재는 아침 약을 점심과 저녁 약에 나누어 복용한다) 취침 전 약에는 꽤 강한 수준의 수면제가 들어 있다. 취침 전 약은 총 네 알. 이 약들을 먹고 난 후 나는 20분 안에 잠에 든다. 남자친구와 외박을 하거나 약이 다 떨어져서 취침 전 약을 챙겨 먹지 못했을 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익일 정오가 될 때까지 뜬 눈으로 멀뚱히 누워 있던 적도 있다. 그만큼 취침 전 약은 내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하지만 내가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니라서 무서울 정도였다. 그 날도 자정 즈음에 취침 전 약을 먹고 잠에 들었고, 오전에 눈을 떴다. 그런데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위에 음식물이 가득찬 것 같은. 내가 무얼 먹었었나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배달 음식 영수증을 발견했다. 그러자 새벽에 배달 어플로 치킨 두 마리를 주문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가족들 모르게 비상계단에서 몰래 먹었던 것도. 남은 뼈 쓰레기는 소화기를 두는 곳에 숨겨 놨었다.
소름이 끼쳤다. 새벽에 그렇게 먹고도 기억을 못하다니. 나는 평소에도 자꾸 무언가를 까먹고 자주 깜빡깜빡하는데, 이건 그 정도를 넘어서 기억상실증 수준이었다. 그리고 치킨을 두 마리나 먹었다는 사실이 더 소름 끼쳐서 토하고 싶었다. 나는 먹토(먹고 토하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새벽에 음식을 먹은 후 자고 일어나면 이미 어느 정도는 소화가 됐기 때문에 다 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날 나는 치킨을 두 마리나 먹었다는 죄책감에 하루종일 먹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음식을 안 먹으면 될 일인데 배는 또 고파서 먹토를 택한 것이었다.
이런 일은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더 있었다. 자고 일어났는데 머리맡에 과자나 빵 봉지들이 잔뜩 있다든가, 또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 기억을 못한다거나. 먹토를 많이 해서 뇌에 이상이 생긴 건가 싶었다. 아니면 술을 먹고 정신과 약을 복용해왔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긴 건가 싶었다. 수면제 부작용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께 요즘 새벽에 자꾸 음식을 먹고 먹토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혹시 음식을 먹은 사실이 기억 안 난다거나 하진 않나요?”라고 물었다. 순간 점집에 온 것마냥 “맞아요!!! 저 그래요!” 했다. 의사 선생님은 수면제 부작용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자세한 용어를 뭐라고 설명해주셨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의사 선생님은 수면제 용량을 줄여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현재 용량으로도 가끔 4시간 만에 깨곤 해서 줄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몽유병 환자마냥 새벽에 일어나서 뭘 먹는 부작용은 제발 없애고 싶은데 또 잠은 자야겠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나는 내 의지로 수면제를 줄여 나가야 한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수면제 부작용에는 기억력 저하, 피로감, 집중력 저하 등 각종 뇌 기능 장애가 있었다. 평생 수면제를 먹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 스스로 생체 리듬을 조절해 나가야 한다. 인터넷에 나오는 수면제 단약 방법은 아주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꾸준한 운동, 규칙적인 생활 같은 것들. 때로는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일단 꾸준한 운동을 하지 않고 있다. 줌바를 끊은 지 어언 두 달째다. 규칙적인 생활? 아침에 잠깐 눈 떴다가 정오나 돼서야 일어나는 날이 비일비재하다. 기초적인 것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으니 하루의 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나는 오늘도 다짐을 해본다. 내일부터는 당연해 보이면서도 기초적인 것들을 해나가겠다. 새벽에 음식을 잔뜩 먹고 아침에 “돼지가 된 건 꿈이 아니었어”라며 울부짖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