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밤하늘에 음력 섣달 보름달이 떴다. 동짓달 보름달을 바라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해가 바뀌어 새로운 달력 앞에 앉아있다. 그러고 보니 브런치 문턱을 사뿐히 넘어 들어온 지 세 달이 지났다. 브런치 에디터님들과 이 공간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은 꽃다발을 전한다.
아마도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이토록 힘들게 하지 않았다면 브런치를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블로그나 카페, 페이스북 등을 전혀 하지 않고, 필요할 때 이메일이나 카톡 정도 이용하며 문서함에 원고를 저장하며 지냈기 때문이다. 코비드로 인해 시간적 여유를 넉넉히 갖게 된 어느 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에 ‘브런치’, ‘글’이라는 단어와 '출판 프로젝트'에 이끌렸다.
며칠 동안 망설이다 지난해 시월 새벽에 몇 자 적어 보내고 이틀 후에 내가 쓸 수 있는 공간을 받았을 때 무척 신기하고 신선했다. 글 쓰는 작업과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의 글을 보며 ‘구독하기’라는 견고한 끈으로 신뢰와 관심을 이어갈 수 있어 좋았다.
이 부분에서 ‘견고한 끈’이라는 건 좀 적절치 않을 수 있다. 왜냐면 서로 구독해서 ‘관심작가’가 되었다 해도 상대방이 쓰는 문체나 글의 주제가 본인의 취향이 아니거나 교감의 강도가 약해지면 상대방에게 그 뜻을 물을 것도 없이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에는 내 글에 라이킷을 해주면 고마운 마음에 ‘구독하기’을 눌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극히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관심작가 구독은 상대방이 나를 구독할 경우에만 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그 이유는 관심작가가 많아지는데 그분들 글을 다 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읽지도 않고 라이킷을 하자니 글 내용이나 문체도 모르면서 무조건 내 이름을 남기는 건 무책임한 행위이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관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규칙을 정하고 나니까 내 관심작가나 나를 구독하는 작가가 많지 않아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브런치 작가와 작가의 차이는?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마다 원하는 방향이나 목적이 다르고, 글 쓰는 능력은 차이가 난다 해도 모든 분들의 공통분모는 ‘진정한 작가가 되고 싶은 것’, 그것보다 더욱 절실한 건 ‘내 안에 있는 많은 느낌과 생각을 글로 표출해 쓰고 싶은 열정, 그리고 완전한 책을 출간하고 싶은 열망’이라고 짐작한다.
이곳에 게시된 글을 읽다 보면 나는 자연스레 글 쓴 작가들을 그려보게 된다. 다른 분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억지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글에 어느 정도 작가들 성향이 녹아있어 자연스레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령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의도나 그들의 가치관, 사람이나 사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살아온 날들 혹은 현재 사는 환경 등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세 달 남짓 꽤 많은 분들을 보면서 그들이 내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브런치라는 한정된 공간에 남긴 글 등을 보다 보면 ‘어떤 성향이구나’ 혼자 미루어 짐작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약간 실망스럽거나 우려스러운 글들도 있는가 하면, ‘어쩌면 이렇게도 성실하고 진솔하게 글과 삶을 병행하며 글을 잘 쓸까!’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작가들 이름이나 모습, 연령조차 잘 모르는 분들이지만 마치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친구처럼 반갑고 정감을 느끼는 분들도 많았다. 그분들은 글로써 이어지는 신뢰로 오묘한 에너지를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50여 일 전에 이런저런 회의가 들어 브런치를 떠나려 했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그 서막은 아마도 연말을 앞두고 브런치에서 온 선물을 받았을 때다. 내 성격은 작은 콩알 하나를 받아도 감사하는 스타일이다. 옆에서 보면 고작 콩알 한 알 받고 저렇게 좋아하나? 싶을 정도로 감격해하고 고마워한다. 그런 내가 기쁘게 느껴야 할 선물에 거부감이 느껴진 건 무엇 때문일까?
브런치 에디터님들과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하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좀 쓴소리일 수도 있겠으나 브런치가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이런 의견도 받아들일 수 있는 눈과 귀,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물이 왔다는 알림이 오고 나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연말정산이라는 선물에 라이킷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당시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된 상황이라 해당사항이 없었지만 몇몇 작가들에게 라이킷 ‘상위 1%, 상위 0,5%’ 이런 표현을 보내는 것을 보고 너무 황당하고 놀라웠다.
그것이 열심히 성실하게 글을 쓰고 라이킷을 받는 분들에 대한 보상일 수도 있겠으나, 글 쓰는 공간에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써서 게시판에 올리고 공감하는 분들이 라이킷을 주는 것은 서로 격려하고 격려받는 좋은 시스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이 작품이 된다는 브런치’라는 품격 있고 고급스러운 공간, 다른 곳과 차별화된다는 공간에서 라이킷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숫자를 통계 내어 상위 몇 프로, 몇 프로로 등급을 나눠 당사자들한테 선물이라고 보내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브런치 바깥세상에서도 책 판매량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유명 작가를 정하기는 한다. 사람마다 가치 기준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아마추어건 프로건 구분하지 않고 브런치 작가로서 자유롭게 글을 쓰는 공간에서까지 ‘상위 몇 프로’라는 표현으로 작가를 분류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전 세계는 각국에 유투버들이나 사회관계망에 자신들의 일상을 올려 인기와 수익을 얻는 것이 대세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유투버 아무개의 구독자가 몇 명이고, 페이스북의 팔로워가 몇 명이며, 아무개가 그 수익으로 얼마를 더 벌었다는 기사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보기 싫어도 화면에 떠 있으니 좋건 싫건 간에 타이틀 기사를 보게 된다.
며칠 전에는 외국 기사까지 인용했다. 미국인 열여덟 살과 스무 살 자매가 인스타로 각각 벌어들이는 수익이 어느 재벌보다 많은 몇 백억이라는 기사와 그런 등속이 민망할 정도로 여기저기 도배되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사생활을 실시간 보여주며 ‘좋아요’와 ‘구독’을 받아서 멋지고 풍요롭게 사는 걸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조차 장래희망을 물으면 멋진 유투버나 파워블로거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버렸다.
구독자가 많고 팔로워가 많다는 것은 칭찬하고 부러움을 살 일일 수도 있으나 지혜로운 솔로몬 왕의 말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 그렇다! 수입은 많을 것이고, 풍요롭게는 살겠지만 그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싶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수십만 팔로워를 거느린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수십만이 그녀를 따르고 관심 갖고 조회하며 ‘좋아요’를 누른다 해서 결코 그런 일상이 행복하지는 않았나 보다. 세상을 떠난 그녀가 화면에 나올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이 세상 모든 분야가 순위를 정하고, 1, 2 등을 정한다 해도 글 쓰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에서 주는 장원이니 우수상, 장려상 이런 것들이 있고 문학상이나 신춘문예가 있지만 그건 성격이 다른 것이다. 라이킷을 10개 받은 글과 100개 받은 것으로 글의 무게와 가치를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숙고해 볼 일이다.
물론 구독자와 라이킷이 많은 글들이 좋은 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또한 적지 않다.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글들이 브런치 바깥세상에서도 그만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작가라는 의미는 글 쓰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글을 쓰는 작가’로 불린다면 그 호칭에 걸맞는 실력과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작가이기를 원한다면!
“화가를 꿈꾸는 지망생이 기초과정은 건성건성 건너뛰고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기존 화가들이나 연륜 있는 화가들이 즐겨하는 기법을 흉내 내면 되겠습니까?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화가가 추상이 멋져 보인다고 캔버스나 종이에 그저 물감 몇 방울 멋스럽게 뿌린다고 해서 예술이 되고, 그림이 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림 그리는데 이론 공부가 뭐 중요하냐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초를 탄탄히 해야 하니까요.”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중견 화가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글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것이니 한글을 알고, 문장만 만들 수 있으면 누구가 쓸 수는 있다. 하지만 글을 쓴다고 해서 다 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글 쓰는 사람들은 처절하게 고민해야 하고,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만드는데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브런치가 글짓기 학원도 아닌데 그야말로 글쓰기 습작 수준의 글들이 난무한다. 그런데도 서로 아는 작가, 구독한다는 이유만으로 라이킷은 기본이고, 극찬의 댓글과 심지어는 '대문호'라는 표현까지 나온 걸 보고는 씁쓸했다. 좋은 글에 칭찬과 격려는 활력소고, 에너지가 되므로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좋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든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조금 다른 분야이긴 한데 어느 회사 광고에 “당신도 00이 될 수 있다.” 누구를 1년만 따라 하기! 이런 카피로 신청자를 모집하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다들 왜 이러는 건가? 싶었다.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건 좋은데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전문가나 특히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은 누구를 따라 하고 흉내 내는 일은 지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며, 더구나 1년 따라 해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 또한 과장 과대광고 아닌가?
하긴 습작하던 시기의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이 좋아하는 밀레 그림 전작을 모사했다. 1999년 파리 8구에 있는 그랑 팔레에서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밀레 그림과 프랑수와 밀레 그림을 비교 전시했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모사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빛을 찾으려 노력했기에 자신의 세계를 창조했다. 그가 만약 밀레 풍으로 계속 그렸다면 오늘의 빈센트 반 고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어느 작가 집에 가서 본 컴퓨터 자판이 움푹 파여 한 개도 성한 것이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작가는 겸연쩍어하며 너무나 많이 글을 써서 그리 된 것이라 했다. “스파이더맨인가? 손가락에서 강한 힘이 분출되나 보네요! 얼마나 많이 썼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어느 작가는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이 휘어져 있다. 그는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박사 과정까지 올곧게 글을 썼다고 했다. 지금도 펜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펜으로 종이에 빼곡히 쓴 다음에 컴퓨터로 다시 입력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누군가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는 걸 들었다.
“요즘 누가 펜으로 글을 써요? 컴퓨터 자판으로 치면 편하고 빠른 데요!”
그럴 수 있다. 요즘 세상인데, 21세기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글을 쓰는 작가는, 적어도 훌륭한 글을 담아내는 작가는 누가 뭐 라건 손가락이 휠만큼, 혹은 컴퓨터 자판이 성한 것이 없이 움푹 패일만큼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편한 컴퓨터 놔두고 왜 펜으로 쓰냐고 말한 사람도 스스로는 글을 쓴다는 사람이었다. 그 멍청한 말을 한 사람에게 한 마디 해주려다가 그것조차 의미 없을 것 같아 한숨 한 번 내 쉬는 걸로 대신했다.
브런치! 이곳에서 행복과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길!
다시 브런치로 돌아와 쓴다. 브런치는 브런치일 뿐! 그 단어의 뜻처럼 그저 가볍게 고민할 것도 없이 즐겁게 글 쓰고, 읽는 사람도 별 부담 없이 보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비타민과 영양제 같은 활력소를 전해받고 에너지를 충전하면 되는 것이다.
브런치라는 공간을 열어 그 문턱만 넘으면 마구잡이로 게시판에 올려주고 작가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작가님’란 명칭으로 부르면 다 작가인지 묻고 싶다. 글만 쓰면 다 글이 되고, 스스로 책으로 엮으면 다 책이 되는 것인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브런치 안의 작가님’, ‘브런치 안의 대문호’가 되어 서로 자화자찬하며 구독하고 라이킷 하는 것에 머무르면 되는 것인지!
어느 출판사 분이 말했다. 책은 넘쳐나는데 독자들에게 팔리지 않으니 그 책들을 창고에 넣어두는데 보관료가 만만치 않은 데다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해 파쇄하는데 그것조차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는 것이다. 종이책으로 내 본 작가들은 잘 알겠지만 몇몇 유명 혹은 인기 작가들 작품 외에는 2쇄 3쇄 찍는 거는 차치하고라도 1쇄도 소화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브런치도 같은 현상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열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 모여 글을 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니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다. 그야말로 ‘내 글 좀 봐줘요!’ 간판에 걸어놓고 물건 고르듯이 골라 라이킷을 누르면 그것으로 완료되는 분위기였다.
내가 브런치에 온 지 한 달 즈음되었을 때 고맙게도 누군가가 ‘알고리즘’을 언급해 줘서 또한 뭔가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걸 감지했다. 키워드 사용법을 전혀 모르다가 브런치 메인에 올려지는 방법 역시 터득하게 되었다. 간판 키워드와 별 관련 없는 내용임에도 키워드를 그렇게 선택해서 메인에 올려진 글들을 보며 씁쓸하기까지 했다.
그즈음 나는 작가명도 바꾸고 프로필 사진도 바꾼 터였다. 솔직히 말하면 글을 올리기도 싫었다.
브런치에 심한 회의를 느낀 상태에서 글 한 편을 실었는데 미국에서 내 글을 보신 어느 분이 “내 글을 기다리는 한 사람을 위해”라는 진심 어린 댓글을 써 주셔서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분의 격려와 “좋은 글 기대할게요!”란 말씀이 큰 힘이 되었다.
1월에 달랑 글 한 편 올린 내가 새로운 작품 대신 그동안 느꼈던 많은 감정을 정리했다.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코로나와 오미크론 여파 때문인지 새로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음력 섣달 얼마 남지 않은 날들 동안 잘 정리하고 준비해서 힘차고 멋진 2022 설날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이 글을 쓴 지 1년 반이 지난 사이에 끔찍한 코로나 바이스러스가 사그러지고 세상은 바뀌었다. 브런치 시스템도 달라졌다. 새롭고도 다양하게!
프랑스 극작가 대문호 몰리에르를 팡테옹에!
지난해는 극작가이면서 연극배우, 그리고 극단장이었던 장 밥티스트 몰리에르가 세상에 태어난 지 400주년 되는 해였다. 1622년 1월 15일에 와서 1673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세상 사람드로부터 ' 대문호'라 불린다. 그에게 붙여진'대문호'라는 호칭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 학창시절, 나는 프랑스 17세기 작가 코르네유와 라신느 그리고 몰리에르 몇몇 작품을 외울 정도로 읽었다.
얼마 전 뉴스에 그를 파리 5구 팡테옹에 이장시켜야 한다는 몰리에르 회원들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현재 팡테옹에 묻힌 작가들 중에는 세계인들이 대문호라 일컫는 빅토르 위고, 알렉산더 뒤마, 여성작가로는 시몬느 드 보브아르와 조르쥬 상드가 있다. 과연 몰리에르도 팡테옹에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여러 과정과 심사를 거쳐야겠지만, 17세기를 풍미했던 풍자극의 대가, 몰리에르 작품들이 주목받고, 불황인 연극무대에 상연되는 것은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책꽂이에서 오랜만에 대학 때 산 몰리에르 희곡집을 꺼냈다. 이미 누르스름하게 빛바랜 몰리에르 희곡집을 펴 보니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열정이 있었나 보다. 세 작품이 수록된 책인데 줄을 치며 읽은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유난히 타르튀프에 여러 번 줄을 그어 놓은 걸 보면 그 시절에도 세상은 지금처럼 혼탁했나 보다. 위선자가 활보하는 세상처럼!
아무쪼록 브런치 작가님들도 나도세상 사람들 마음에 진정한 울림을 주고, 감동시킬 수 있는 그런 훌륭한 글들을 쓸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