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습관 때문에 새벽 5시에 눈이 떠진다. 서울 방배동 집이 아니라 여기는 제주도 협제리 '하티(힌디어로 코리끼 라는 뜻이라 함) 게스트하우스' 3층방이다.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고 2층으로 내려가 공동 세면장에서 간단하게 양치와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린다. 샤워를 하고 싶지만 이른 새벽이다보니 숙소 내 다른 사람들이 깰까 봐 패스한다. 방으로 돌아와 전날 전송된 스마트폰 문자들과 댓글을 확인하고 어제 '브런치(카카오 글쓰기 플렛포옴)'에 올린 여행 에세이도 다시 확인해 본다. 어제저녁 꾸벅꾸벅 졸면서 쓰다 보니 맞춤법 검사를 했는데도 엉뚱한 글자와 문맥들이 눈에 들어와서 수정을 한 후에 모친께 카톡으로 문안인사와 글을 보내드린다. 나의 모친은 내 글의 첫 번째 구독자이다. 잘 쓰지는 못하지만 항상 응원을 해주는 나의 영원한 찐 팬이다.
여기는 제주도 협제리 '하티 게스트하우스' 3층방이다.
바다와 비양도가 내려다 보이는 2층 공용 테라스에앉아 편의점에서 사서 냉장고에 보관했던 샌드위치와 월남 커피로 아침식사를 한다. 하늘의 구름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 보이고 서울 하늘에서는 상상도 못 할 거리에 구름이 내려와 있어서 기분이 좋다. 식사 후에는 오늘 탐방해야 할 코스를 가이드북을 이용해서 리뷰하고 코스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미리 읽어 본다. 실제로 현장에 갔을 때 미리 관련 이야기을 알고 가면 감동이 두배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손빨래로 옥상에 말려두었던 등산복을 챙겨 입고 허리 배낭에 넣을 물건들을 정리한다. 올레 패스포트, 썬크림, 손수건, 선그라스, 물통, 장갑, 행동식(주로 영양바, 쵸코렛), 머프, 이어폰, 안경 케이스를 쑤셔 넣고 올레 모자를 쓰고 출근한다. 오늘은 제주올레 13코스로 출근한다.
어제 퇴근할 때 보니 용수포구에 가는 버스 편이 좋지 않아서 과감하게 일부 구간을 패스하고 용수 교차로에 하차해 13코스를 시작했다. 흐린 날씨이기는 해도 걷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용수저수지를 통과하고 고사리 숲길을 지나갔다. 어릴 때는 고사리 냄새가 싫어서 거의 안 먹었지만 요즘은 채식을 해서 그런지 없어서 못 먹는다. 더군다나 제주도 고사리는 맛좋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유심히 고사리를 처다보면서 고사리 숲을 지나갔다. 아마 등산모임의 회원들이 동행 했으면 그냥 보고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간 스탬프를 찍는 낙천 의자마을에 도착할때까지 식당이 거의 없었다. 코스 종점까지식당이 없을 거 같다는 생각에 코스를 살짝 벗어나서편의점을 찾아 간단하게 요기도 하고 비상식량도 구입했다.
낙천리 의자마을을 지나 13코스의 하이라이트인 '저지오름(높이 390m)'에 올랐다. 오름 정상에 깊이가 60m인 원형 분화구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감으로 정상에 오르고 또 분화구 밑으로 내려갔다. 한라산의 백록담 같은 느낌을 기대했지만 물은 없고 온갖 수풀림으로 뒤덮여 있어서 낯설기는 했지만 나름 특별한 경험이었다. '저지'라는 것은 '닥나무(예전에 '한지'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의 한자식 표현이라고 한다. 예전에 이곳에 닥나무들이 많아서 '닥마르오름' 이라고도 불렸다. 이 동네의 마을 이름도 '저지 마을'이다. 이 마을이 올레꾼에게는 특별하다. 왜냐하면 3개 코스(13코스, 14코스, 14-1코스)가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올레 전 코스에서 이렇게 3개 코스가 만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마을로 내려와 종점 스탬프를 찍고 버스 시간을 확인해 보니 40분 정도의 여유시간이 생겼다. 아침, 점심으로 편의점 식사를 했더니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식사가 필요해서 길 건너 식당에 들어갔다. 왠지 오늘 여정 중에 지나친 고사리 숲이 생각나서 '고사리 육개장'을 주문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던 육개장 국물이 아니었다. 마치 해물 누룽지탕에 녹말이 들어간 것처럼 약각 걸쭉해서 실례를 무픕쓰고 사장님께 물어봤다. "사장님, 혹시 육개장에 녹말이 들어가나요?" , "아니요, 제주도 육개장에는 메밀이 들어갑니다." 해초류가 들어간 제주도 음식인 '몸국'에도 육개장처럼 메밀이 들어가 걸쭉하다는 사장님의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식사 전에 제공 된 노란색 물도 생수가 아닌 메밀 물이었다. 왠지 더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물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