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뷰 공간

잉어가 소주를 헤엄치다

100일 글쓰기 (96일 차)

by 소채

'눈 내린 추운 겨울날, 살짝 녹은 파아란 연못에 빨간색 잉어 한 마리가 몸을 좌우로 힘차게 흔들면서 유유히 물살을 가른다.' 도대체 이런 아기자기한 조그마한 도자기잔을 만든 사람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놀랍다. 또 그런 도자기잔을 보유하고 있는 친구의 집도 놀랍다. 40년 지기 고등학교 X알 친구는 술을 안 마신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한 해의 마지막날 송년회를 위해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잉어 술잔에 소주를 한잔씩 따라 주었다.


'눈 내린 추운 겨울날,
살짝 녹은 파아란 연못에 빨간색 잉어 한 마리가
몸을 좌우로 힘차게 흔들면서 유유히 물살을 가른다.'


그것도 요즘 제일 핫하다는 가수 박재범이 론칭한 '원소주'를 말이다. 짙은 비치색 술잔 바닥에 딱 붙어있는 빨간색 잉어는 얼핏 보면 금붕어 같기도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잉어 술잔'으로 소개되어 있다. 찰랑이는 투명색 액체 속을 마치 헤엄치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서너 잔 마시다 보면 마치 잔속의 잉어가 내 입으로 헤엄쳐 들어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벌써 한 달 전에 2022년의 마지막 날을 고등학교 친구들의 부부동반 모임의 송년회 날로 정했다. 마침 토요일이라서 모두 동의를 했고 점심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모임의 리딩은 주로 여성총무가 한다. 모임의 성격상 남성 회원들 보다 여성 회원들의 입김이 좀 세다. 아니, 아주 많이 세다. 그래서 식당도 보통은 여성들이 정하고 회비도 여성 회원들이 지불한다. 그렇게 해서 정한 식당은 경기도 광교에 있는 '마키노차야'라는 시푸드뷔페이다.


식당이름을 몇 번 들어도 외워지지 않는 어려운 이름이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던 시푸드 뷔페라는 말에 난 환영을 하면서도 왠지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느낌이다. 내가 채식을 선언하고 나서부터는 친구들 모임을 고깃집에서 한 적이 없었다. 이번 식당도 남자 총무인 나를 위한 친구들의 배려이다. 아무래도 봉사 자리이긴 해도 권력의 핵심인 총무 자리를 장기집권 해야 할거 같다.




서울에 사는 친구네 부부가 우릴 픽업해서 차량 한 대로 이동했다. 고속도로에는 차가 전혀 막히질 않았다. 과거 5년 동안 지겹게 출퇴근했던 도로를 다시 달리다 보니 느낌이 조금 싸했다. 고층빌딩들에 둘러싸인 광교 중심가의 식당에서 오후 2시부터 넉넉하게 두 시간 동안 여유 있는 식사를 했다. 보통은 아침을 원래 안 먹는 간헐적 단식을 하는 나는 전날 8시부터 금식을 하고 다음날 정오가 되면 16시간 만에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운다.


하지만 뷔페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두 시간을 더 굶다 보니 더 배가 고팠다. 식당의 시그니처 요리인 '앙쿠르트 수프'를 시작으로 서너 차례 왔다 갔다를 반복하다 보니 금세 배가 빵빵해졌다. 항상 뷔페에 오면 본전 생각 때문에 과식을 하고 살이 찐다. 오늘 같은 날은 나의 필명이 좀 민망해 진다. '소채(소식과 채식)'에서 갑자기 '과채(과식과 채식)'이 되어 버렸다.


식당에서 1차를 마치고 자리를 광교에서 동탄으로 옮겼다. 요즘 누가 2차를 가겠냐 만은, 우리는 여성 총무네 집으로 갔다. 지난 6월에도 친구들을 초대해서 홈파티를 했는데, 이번에도 집으로 초대를 한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통 큰 친구의 부인은 한 달 전부터 자발적, 의욕적으로 요리를 하고 파티를 준비한 것이다. 아무래도 여성총무도 계속 연임을 시켜야 할 듯하다. 누군가의 배려와 노력은 또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


너무 고마웠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연말에 공로상 한번 못 줬다. 즉흥적으로 수고한 여성총무를 위해 어깨 안마를 제안했고 모두들 빨리 해주라고 했지만 딱 한 사람이 반대했다. 그래서 안마 대신에 전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브런치에 올린 나의 글 <설렘반, 두려움반>을 낭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밤은 무르익고 디켄딩한 와인과 잉어가 헤엄치는 소주잔은 식탁을 오고 갔다.


" Happy New Year !
2023년에는 친구들 모두 행복한 일만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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