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공부를 못했다.
다행히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성적이 조금씩 오르면서 4년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4학년 때 학과사무실로 들어온 대사관 무관비서 채용 공고에 지원해서 운 좋게 합격했다.
그때부터 나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처음엔 외국인과 일하는 것도 처음이고 말도 잘 못 알아들어서 많은 불편함이 있었는데
직장인으로서 버티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아마 한 6개월 동안은 내 책상에 앉아 대학생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결국엔 귀가 열리면서 내 상사와 같이 근무하던 군인들의 대화도 알아듣게 되었고 업무도 익숙
해지면서 새로운 무관이 왔을 때는 해야 할 업무들을 내가 알려드리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태국에 살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당시 사업을 하던 시아버님의 인맥으로 통역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익숙하지도 않고 실수도 많았지만 횟수를 더해갈수록 주위에서 평판이 좋아
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일은 계속 들어오게 되었고 다양한 방면에서 경험을 쌓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공부머리에 비해 일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통역의 특성상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될 말들을 잘 가려서 해야 하기 때문에 일하면서 눈치도 생겼고
일머리가 발달하게 되었다.
공부는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듣고 공부하여 시험으로 평가받는 개인적인 일이라면
일은 하나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적인 협조가 필요하고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상대방과 의견도 조율해야 하는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조직의 업무다.
어쩌다 가끔 좋은 학교를 나온 친구들을 보면 의외로 일머리가 부족한 경우가 있었다.
하나에 집중하여 공부는 잘할지 몰라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거나 눈치가 없어서 해선 안 될 말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보통 사회생활은 나 혼자만 잘해서 이뤄지지 않는다.
다수의 의견, 생각을 조율하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한데 공부만 잘하던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서
일머리가 부족한 거 같다. 즉 나무는 디테일하게 잘 보는데 숲을 못 보는 식이다.
나도 처음엔 눈치가 없어서 통역할 때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꾸준히 일하면서 눈치도 생겼고 상대가 원하는 조건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강조하면서 제안까지 할 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일머리다.
내 주위에서 나보다 더 일머리가 뛰어난 친구들을 보면, 그들은 상대가 요구하기도 전에 원하는 조건들을
먼저 제안하고 알아서 맞춰준다.
그들은 대단한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전공한 학과도 그리 유명하지도 않다.
심지어 고등학교만 나와서 독학으로 태국어를 배우고 다른 건설사에서 밑바닥 일부터
시작해서 배운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일을 잘하고 눈치도 빠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감탄한다.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다르다는 것을.
실제로 한 스타트업 대표랑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물었다. 면접 볼 때 대학 간판이 중요하냐고.
대표가 말했다. 서울대, KAIST, 포항공대 말고는 다 똑같다 하더라.
즉 일할 때는 몇몇 대학을 빼고는 다 비슷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뛰어난 사람들 중에 의외로 학벌이 안 좋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반대로 우리가 말하는 SKY를 나온 사람들이 다 일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학벌이 예전만큼 대단한 시대는 아닌 것 같다.
학벌보다는 실력이 중요한 시대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실력을 가진 사람을 요구하는 시대다.
이제는 공부머리보다는 일머리가 뛰어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