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기에, 나는 그렇게 기다리던 3학년이 되어 내 개인적인 시간이 많음에도 계속해서 회의감이 드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다. 이렇게 시키는 것만 하며,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에 무조건 상명하복 해야 하고, 내 자아는 점점 없어져가고 획일화되어 가고, 무엇보다도 도전과 경험의 폭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내가 수동적으로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한 요소들이었다. 또 한 번 내가 우물 안 개구리 같았다고 느꼈다. 역설스럽게도, 도전적으로 많은 경험을 하고 세상을 접하며 살고 싶다는 내 욕구의 이면에는 '이 편안함에 안주하면 나도, 우리 가족도 모두가 편할 텐데', '내가 어떻게 이 학교에 들어왔는데' 이런 심리가 작용했기에 지난 1년간 섣불리 결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가서 '무엇을', '어떻게' 도전하고 경험하고 싶은 건지 몰랐다. 이렇게 회의감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갔다.
이런 나의 일상을 1년 넘게 지속하게 해 준 것에는 위에서 말한 목표들도 있지만, 그만큼 중요했던 것은 '사람들'이었다. 화랑대에서의 2년 6개월간의 추억이 너무 무거웠다. 평소에도 사람들에게 정을 많이 주는 성격인 나에게 사람들과, 집단과의 이별은 너무 힘들 것을 알고 있었다. 체고에서 자퇴했을 때에도 외로움이 심했고, 대회사진에 내가 없다는 것이 믿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까지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내가 주체적이고 도전적인 삶을 살고 싶은 마음보다 훨씬 컸기에 생도생활을 잘 지속할 수 있었다.
또한 나에게 있어서 생도생활은 사회생활과 마찬가지였으니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긁히고 아물어 많이 성장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로 인해 웬만하면 상처받지 않았다. 내 사람들만 챙기면 된다는 것을 2학년 말 즈음 깨닫고 내 바운더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진심을 다했다.
그러다 3학년 6월, 어떤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내 바운더리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나에 대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고, 이 학교에 계속 있을 수 있게 만들었던 끈을 놓아버렸다. 그 끈은 끊임없이 이때까지 숨 막히게 세운 목표들과, 내가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바디프로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나니 당장의 목표도,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신뢰 둘 중 어느 하나도 내가 주체적으로, 도전적으로 세상을 경험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기에는 이미 너무 작아져버렸던 것이다.
나는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냥 일반 대학교로 편입할 생각이었다. 다들 하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 있나 싶었고 나는 목표를 정하면 무조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기에,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확고하니 훈육장교님과 훈육관님께서는 아쉬워는 하셔도 말리진 않으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2학년때부터 이런 걸로 나가야겠다고 꾸준하게 말해왔던 걸 아시고, 이번에 얘기할 때에는 확고하게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니 그러라고 하셨다. 아버지께는 처음으로 이렇게 힘든 걸 말씀드렸는데, 처음엔 당연히 걱정되시니까 엄청 반대하시다가 이 고민이 오래된 고민이고 난 확고하다는 것을 느끼시고 결국엔 나를 응원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조부모님께서도 아버지와 마찬가지셨다.
그러나 가족의 반대보다 내가 흔들렸던 건, 한 선배생도 님과 밤에 이야기를 하고 나서였다. 그 선배생도 님께서는 솔직히 육사 여생도라는 타이틀이 이 안에서는 힘들어도 길게 봤을 때 사회에서 모두가 인정해 준다고, 여기를 졸업하는 게 나를 이 사회에서 경쟁력 있게 만들어주는 방법이라고 했다. 내가 이곳에서는 조금만 해도 인정받는데 밖에 나가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잘난 사람은 너무 많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만약 퇴교한다면 이후의 내 계획 물어봤다. 나는 당시 내가 갖고 있던 나름의 계획을 말했는데, 말하고 나서 내가 생각해 봐도 그 길에 대해 흥미 없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하고, 그냥 막연하게 하는 말들 같았다. 당시 내 계획은 문과편입은 어려우니 지금부터 이과 수학을 공부해서 이과로 편입해서 취직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나는 소위 말해 계획충으로서 성공적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고 흥미가 있는 계획이라면 내 계획에 심취해 신나서 자신감에 찬 상태로 말할 텐데, 이 계획을 말하면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육사 여생도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이 갖는 사회에서의 경쟁력을 생각했을 때 흔들렸던 것이다. 이 날은 너무 혼란스러웠던 밤이었다. 내가 원하는 삶은 군대 밖에 있는 게 확실했지만, 그게 뭔지 억지로 설정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뭔가가 확실하게 있어서 나가는 게 아니라면 그냥 여기에 있어야 하나, 그냥 5년 차에 전역하고 생각할까, 등의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해 많은 물음표를 던졌다.
이 혼란스러웠던, 폭풍 같았던 일주일이 내게 성장을 가져다준 시기였다. 이때까지 살면서,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이 뭐냐는 질문에 답 한 것 말고는 내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웬만한 K-학생들은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보다는 어디 대학에 갈 거냐는 질문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 이를 통해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대답을 듣기 위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썼다. 보통은 대학생 때 전공이 정해지고 어떤 진로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직업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한, 그리고 내 가치관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가 이런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동안 하루종일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만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이만갓지라는 성공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남들과는 달랐다. 중학교 때부터 스스로 작게 사업을 시작해서 23살에 400억의 자산을 일구어 낸 성공한 기업가이다. 그 사람의 말과 마인드를 보고, 너무 크게 와닿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단순히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람처럼 크고 선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대범함이 필요하고, 자신의 목표에 대한 확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안의 어떤 욕구를 자극했던 것 같다. 그 느낌은, 내가 체고로 진학할 때 느꼈던, 육사라는 목표를 선택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같았다. 정말 두근거렸다. 딱 느낌이 왔다. 다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제 정말 목표도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