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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 Jul 04. 2024

#4. 네 번째 몰두, 샌드허스트

 22년 1월, 나는 어느 때보다 더웠던 겨울을 보냈다. 그토록 바라던 육사에 합격한 후 1월 21일부터 가입교 및 화랑기초훈련을 받게 되었다. 육사 관련 도서나 영상 등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은 거의 다 접하고 갔기에 화랑기초훈련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화랑기초훈련은 빨리 끝났으면 좋겠었던 그런 시기가 아니라, 정말 군인으로서 사명감을 느끼게 되고 자긍심과 열정이 커졌던 그런 시기였다. 어둠의 시기가 아니라 밝은 빛과 같은 시기였다. 내가 군인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멋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랑기초훈련 5주를 보내고, 2월 말에 정식으로 생도가 되었다.

 내가 꿈에 그리던 곳에, 꿈에 그리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이런 마인드로 인해 이 집단에서 내가 더 큰 뭔가 이루고 싶다는 한 단계 발전된 목표를 갖게 되었다. 아무래도 여생도가 소수이다 보니 남들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가 잘 해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육사라는 집단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모든 기회들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매 순간을 그냥 살지 않았다. 단 하루도 낭비하지 않았다. 학과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체력단련도 꾸준히 열심히 했다. 보통 17시에 일과가 끝나고 나면 내 개인정비 시간인데, 그 시간은 항상 운동과 공부를 하며 보냈었다. 그렇게 육사에서의 첫 학기는, 분대 생활에 충실하며 많은 추억을 쌓고, 스스로도 자기 계발을 열심히 하며 끝났다.

 그 해 여름, 하계군사훈련 때에는 대대장 생도에 지원했다가 중대장 생도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 중대장 생도의 직책을 맡았다. 그때 나는 사람으로서 인격적으로 많이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리더의 역할에 있어 내가 한 말들의 책임감과 무게를 느끼게 되었고, 다사다난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의사소통의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어떤 리더가 되어야겠다는 내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이렇듯 스스로 군인으로서, 성인으로서 많이 발전한 시기였다.

 짧은 3주간의 휴가를 보내고,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다. 2학기 때에는 1학기보다 더 분대활동을 많이 했다. 사람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정말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던 시기가 되었다. 대구 사람이었던 내가 서울 이곳저곳을 주말에 놀러 다니며 많은 경험도 하고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었다. 그러다 9월, 내 생도생활 버킷리스트를 한 번 더 이룰 기회가 찾아왔다. 사실 경찰대에서 육사로 목표를 변경하게 되었던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바로 미육사인 웨스트포인트에서 매년 열리는 전 세계 사관생도 군사경연대회, 샌드허스트 대회 출전이라는 목표였다. 그 대회에 꼭 나가고 싶어서 9월에 공고가 뜨자마자 바로 신청했다. 여생도 2명과 남생도 9명으로 구성된 팀을 선발 시험을 보고, 23년도 샌드허스트 팀으로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 생도생활은 샌드허스트를 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정말 나에게 큰 영향을 줬다. 22년 9월부터 시작해서 23년 4월 말까지 훈련해야 했다. 또 한 번 나의 목표에 대해 달려가는 여정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체력적인 한계도 많이 느꼈고, 정신적으로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잘하고 싶은데 마음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좌절도 많이 했던 시기였다. 아침에 다른 생도들보다 30분 일찍 일어나서 7km씩 뛰고, 오전에 수업 듣고 오후에 훈련하고, 저녁에도 훈련했다. 그러고 나서 거의 매주 있는 시험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준비했다. 거의 체고 생활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체고 생활보다 더 부담이 됐었다. 운동과 공부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생도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 2학년은 하급생도로서 자유시간이 충분히 있지도 않고, 쉬려고 하면 뭔가를 해야 하는 그런 학년이었기에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에 훈련과 공부할 것 다 하면 12시가 넘었고, 6시간 이상 잔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루는 아침점호를 하는데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나도 모르게 쓰러진 적도 있었다. 이렇게 반년 넘게 살았다.

 이렇게 나를 갈아 넣으며 2학년이 되고, 대회를 한 달 앞둔 3월, 27kg 군장을 메고 산악행군을 하던 중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넘어진 순간 뭔가 잘못된 걸 느꼈다. 맨몸으로 넘어진 거였으면 그냥 조금 접질리고 말았을 텐데, 무거운 무게를 메고 넘어져 그런지 인대가 부분파열됐다. 대회가 코앞인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다친 것이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다. 그래도 한 달 완전히 쉬면 낫는다는 얘기를 듣고, 어쩔 수 없이 시합 때까지 훈련 열외하기로 했다. 팀원들에게도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상체운동만 조금씩 하고 회복에만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미국으로 출발하는 날이 왔다. 대회 전까지 가장 중요한 한 달 동안 유산소도, 하체 근력운동도 못 한 상태로 웨스트포인트에 도착했다. 거기에 가서야 간단한 조깅을 처음 했다. 발목 부상은 거의 다 나았지만, 체력과 근력이 떨어진 그런 상태에서 극고강도의 대회를 뛴다는 것이 걱정도 됐고, 부담도 됐다.

 대회 당일이 되었다. 대회는 1박 2일로 진행된다. 이전까지 하던 걱정과는 다르게 대회 시작하고 나서는 너무 신났다. 이때까지 노력했던 것들에 대한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다. 후회 없이 미친 듯이 하겠다는 마인드로 대회에 참여했다. 마지막 ruck march 전까지의 모든 과제들이 재밌었다. 결과도 중요했지만 그 순간 정말 최선을 다했던 모든 과제들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어떤 과제 간 기동에서 다른 나라 남생도들도 제치고 2등으로 들어왔던 기억이 제일 뿌듯하게 남아있다. 1일 차 모든 과제가 끝나고 단 하나를 남겨두고 있었다. 대망의 ruck march였다. 바로 10마일(약 16km) 행군인데, 말이 행군이지 군장 뜀걸음이었다. 다치기 전까지는 내 강점이 군장뜀걸음이었을 만큼 자신 있던 종목이었다. 그래도 훈련 쉰 것 치고는 과제 간 기동에서 나쁘지 않은 기동력을 보여줬기에, 난 나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웅장한 밴드 음악을 배경으로 한 부저 소리에 우리는 출발했다.

 기동로는 평지가 아닌 산악이었다. 한 달 전 같았으면 그냥 쉽게 갔던 길도, 하체가 버텨주질 못해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내가 처지기 시작하자 팀원들이 나를 끌고 가줬다. 한 10km쯤 가서였을까, 쥐가 올라왔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가야 되는데, 정말 간절하게 가고 싶은데 쥐가 나서 가지를 못했다. 처음에는 쥐가 난 다리를 끌고서라도 아득바득 움직였다. 총으로 다리를 계속 때려서라도 쥐를 풀었다. 그렇게 쥐가 나고 풀고를 반복하다가 임계치에 다다랐는지 두 다리에 동시에 쥐가 나서 종이장이 쓰러지듯이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으로 넘어졌다. 주위에 팀원들이 다시 일으켜줬지만, 얼마 못 가 계속 똑같이 다시 쓰러졌다. 그렇게 악착같이 쓰러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며 14km쯤까지 갔다. 너무 가고 싶은데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아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넘어져있을 때, 영국팀이 우리나라를 제쳤다. 그때 팀원 중에 한 명이 "영국 가잖아!"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지막 없는 힘까지 다 끌어다 썼다. 그렇게 다시 또 기동 했다. 이제 정말 골인점이 보였다. 그까지는 정말 정신력으로 갔다. 그러나 골인까지 400m 남은 상태에서, 나는 겨우겨우 붙잡고 있었던 의식마저 놓았다. 그냥 기절해 버렸다. 사실 난 이때부터 기억이 없다. 너무 고맙게도, 그리고 또 미안하게도 팀원들이 의식도 없는 나를 부축해서 골인점까지 들어갔는데, 나는 바로 후송당했다.

 눈떠보니 미 육사 내부의 병원에 누워있었다. 눈 떴을 때 내 다리는 온통 멍투성이었고, 왼쪽 엄지발톱은 뽑혀있었다. 내 옆에는 우리 학교 학교장님께서 계셨다. 내 몸상태는 뒤로 하고, 우리가 몇 등인지 결과부터 여쭤봤다. 예상보다 낮은 등수였다. 기동 간 총을 대신 들어줘 페널티를 받은 것이다. 정말 한탄스러웠고,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대회는 2일 동안 진행되기에, 다음 날 과제들을 잘하면 됐었다. 그래서 나는 의사 선생님을 보자마자 나 지금 나갈 수 있다고,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절대 안 된다고, 지금 더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거기서 2차적으로 절망을 했다. 이렇게 미친 듯이 노력하고 지금까지 팀원들과 늘 함께 달려왔는데,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다니 너무 절망스러웠다. 그렇게 큰 병원으로 옮겨지고 저체온증과 횡문근융해증을 진단받았다.


 결국 대회 이틀차는 참가하지 못하고 병실에 누워있어야 했다. 사실, 전날 그렇게 때 써서 만약에 대회에 참가했다면 더 큰일이 났을 것이다. 이틀차에 눈 뜨자마자 몸이 움직이질 않았고,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일어설 수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그냥 가만히 누워서 대한민국의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고생하고 끝이 이렇다니, 날 탓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팀원들이 대회 끝나고 감격에 젖어 찍은 사진에 나는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그리고 원래 대회 끝나고 미국에서 이틀정도 놀 계획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간마저도 이렇게 병실에서 보내야 한다니. 크루즈 디너까지 20만 원 넘게 주고 예약해 놓았는데 환불도, 양도도 안 된다니. 그리고 나 때문에 예상했던 등수보다 훨씬 낮은 등수를 받고, 나 때문에 동행하신 간부님들도 일처리로 인해 고생하시게 된 이 상황이 좌절스러웠고 힘들었다.

 귀국행 비행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 데다가, 미국 병원은 모두가 알다시피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입원하면 몇천만 원이 깨진다. 이런 상황으로 퇴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미국 병원에서는 지금 CK수치가 점점 올라가는 상태인데 네가 지금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위험하다는 소견이었다. 한국 측에서는 한국 군의관이 괜찮다고 그냥 오라고 했다고 하니 미국 의사가 물었다. "그럼 만에 하나 이 환자 증상이 악화된다면, 당신들이 책임질 건가요?" 그러자 정적이 흘렀다. 내가 우리 군에 크게 실망한 부분 중 하나였다. 책임을 질 수 있냐는 말에 망설이는 것을 보고, 정말 우리나라 군의관 말을 신뢰해서 내가 괜찮기 때문에 퇴원시키겠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끊어놓은 비행기 때문에, 그리고 엄청난 병원비 때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내 이런 생각이 확실해지게, 이어서 말씀하셨다. "네가 결정해. 근데 지금 팀원들도 다 너 기다리고 있고 네가 지금 안 가면 비행기도 다시 끊어야 돼. 그리고 여기 입원하는데 하루에 **달러란다."라고 하시며 내가 대답을 미루니 계속 한숨을 쉬셨다. 다 맞는 말이고 이해가 됐지만, 그 맞는 말속에 내 건강을 걱정하는 말은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는다는 것에 실망했다. 내가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대회에 참가하다가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실제로도 없음) 그저 한국 대표로 국위 선양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참가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싶었다. 이때 정말 큰 상처를 받았다. 결국 나는 퇴원하겠다는 결정을 했고, 다행히도 무사히 한국으로 귀국했다. 비록 팀원들과 끝까지 함께하진 못했지만, 내가 그렇게 될 때까지 노력했다는 게,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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