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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니랑 May 12. 2024

나는 오늘도 점자를 찍는다.

  가슴이 시린 1996년 어느 날, 앞에 가시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따라 동생의 손을 잡고 학교 교문을 처음 들어갔다. 가출을 하겠다고 다짐했던 나는 극심한 반대를 뒤로 한 채 외할머니의 눈물을 벗 삼아 교무실에 들어왔다. 입학상담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상담을 해주신 선생님께서 점자일람표와 「맹인복지」란 점자책을 손에 쥐어 주셨다. 그 순간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점자 일람표를 달력 뒷면에 크게 그리게 했다. 매직으로 손바닥 크기로 초성, 중성, 종성, 약어, 약자까지 달력에 그리도록 하였다. 밤새도록 책상에 앉아 한글 점자를 만졌다. 점자를 만지다가 잠이 들면 꿈에서도 점자를 공부했다. 손끝으로 자음과 모음을 읽게 되고 약자, 약어도 점독할 수 있었다. 노력을 할수록 한 줄을 읽던 시간은 한 페이지로 늘어났고 손가락도 덜 아프게 되었다. 

  한 페이지를 겨우 읽게 되었을 때 1996년 3월 특수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후 봄꽃이 만개한 4월,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교과서를 읽어 보라고 하셨다. 나는 더듬더듬 한글 점자를 읽었다. 교실에서 침묵을 깨는 선생님의 한마디는 ‘점자를 잘 읽었다’였다. 선생님께서는 점자를 빨리 익힌 학생은 없었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한 손으로 읽는 것보다 양손으로 읽으면 더욱 속도가 빠르다고 하시며 양손으로 책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지금도 나는 점자책을 읽을 때 양손으로 읽는다. 도서관에서 빌린 점자 시집을 교실에서 읽었다. 점자를 찍고 책을 읽는 재미는 학교생활을 즐겁게 해 주었다. 점자의 6점들은 세상과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였다. 8년의 시간이 지나고 학교에서 같은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만나면서 주고 싶은 게 많았다. 특히, 일반학교를 다니다가 사고나 질병으로 중도에 실명한 학생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실명으로 삶의 의지가 꺾이고 절망 속에서 좌절하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아침마다 점자를 가르치고 있다. 

  노을이 지는 운동장에 서서 가만히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학교를 입학하고 점자를 익히면서 인내했던 시간들은 나에게 강한 의지를 남겨 주었다. 오늘도 나는 출근길에 결심한다. 나와 학생의 성장을 위해 나는 오늘도 점자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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