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20년 가까운 우간다 학교 사역을 끝내고 돌아오셨다. 2006년 우간다 소로티 난민 캠프가 가까이 있는 곳에 교육을 전혀 못 받는 아이들을 위해 나무밑에서 유치원 교육부터 시작했다. 연세 많아 이제는 학교를 다른 분에게 맡기신 듯하다. 현지인 선생님들이 잘 운영하실것이다.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서 희망을 주신 두 분을하나님은 얼마나 칭찬하실까.
허허벌판 빈터에 기초공사를 하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고 학교가 지어졌다. 이이들과 학부형도 처음부터 이 일에 동참했다.
나무밑에서 공부하다가 교실이 생겼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두 분을 생각하다우간다에서 의사를 하셨던 루실 티즈테일이 생각났습니다. 몇 년 전에 쓴 수필이지만 여기에 올립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작은 창에 햇볕이 가득합니다. 참으로 화창한 봄날씨입니다.
뜰에 서 있는 꽃사과나무에 꽃이 피어 하얗습니다. 벌 한 마리가 한가롭게 납니다. 연보라 라일락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짙은 향기가 뜰 하나 가득합니다. 영산홍과 철쭉이 사이좋게 피었습니다. 희고 붉은 두 빛깔의 듀엣이 아름다운 화음을 빚어냅니다.
문득 하얀 배꽃비(梨花雨) 무수히 쏟아지던 지난날의 그 과수원길이 떠오릅니다. 벚꽃도 복사꽃도 연분홍 꽃비로 그렇게 쏟아졌습니다. 정신이 아득했었지요. 파랗게 숨어 피던 오랑캐꽃, 숲 속에서 우연히 만난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들, 다 감격 없이는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요?
오래전에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텔레비전 연속극이 있었습니다. 시청자를 참 많이 울린 극입니다. 다음은 그 한 장면입니다.
아들이 엄마에게 울면서 소리칩니다.
“엄마 몸이 엄마 꺼야?”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작은댁을 얻어 아기까지 낳아 따로 살고 있습니다. 그 아기 엄마가 신장병이 났을 때 엄마는 자기 신장 하나를 떼어줍니다. 바보 같은 엄마에게 화가 나서 아들이 소리친 것이지요.
또 다른 한 장면입니다. 엄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아버지의 작은댁이 엄마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엄마가 그녀에게 묻습니다.
“아기 엄마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줘?”
작은댁이 울면서 대답합니다.
“형님이 저에게 너무 귀한 것을 주셨어요.”
엄마가 말합니다.
“너무 고마워하지 마. 뭘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있으니까 줬겠지, 뭐.”
자기에게 있으니까 주었다고 무심히 말하는 엄마, 연속극 속의 인물이지만 그 사람이 나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또 하나 생각났습니다. 루실 티즈테일, 전기 ‘아프리카 내 사랑’의 주인공입니다. 캐나다의 여자 외과의사인 그녀(1929-1996)는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일하다 에이즈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독재자의 폭정과 학살과 전쟁의 땅 우간다에서 35년 동안이나 살았습니다. 그녀는 내전으로 인한 부상자들의 신체를 절단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신체부위를 헤집어 파편을 꺼내곤 했다 합니다. 그는 결국 수술과정에서 에이즈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을 희생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미스 의과대학’으로 미모도 뛰어났던 그녀, 어린 딸을 안고 있는 젊은 날의 그녀는 참 예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꾸고 실현시키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 심지어 에이즈와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고 말한 그녀는 참으로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꽃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도 많습니다. 굳이 티즈테일이나 슈바이처, 테레사 수녀같이 성스러운 특별한 분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인간의 정신 중에서 가장 고귀한 ‘희생’이라는 정신을 실현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을 결코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 곁에는 항상 있습니다. 그분들은 단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겨우 눈곱만 한 작은 일 하나 하고도 무슨 큰일이나 한 것처럼 착각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