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세다. 오늘은 체감온도가 영하 25도는 될 것 같다. 눈가루가 마치 사막의 모래처럼 휘날려 어제 손자 하준이가 썰매 탄다고 눈 위에 새긴 발자국과 썰매자국을 다 덮어버렸다.
호수는 꽁꽁 얼었다. 호수에 물이 없으니 거위들이 어디론지 날아가고 한 마리도 없다. 집 앞으로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 사람은 물론이고 거위와 오리가 보이지 않는 바깥은 눈보라와 세찬 바람만이 몰아치는 하얀 얼음나라다.
1층 마루는 두터운 카펫이 깔려 있고 히터가 온종일 돌아가고 있어도 찬 기운이 바닥에서 올라온다. 한파경보가 내려 학교는 다 휴교다. 식구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딸도 무사히 출산한 후 퇴원해 집에 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신 지 두 달 후 사랑스러운 손녀가 태어나, 나는 그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언제나 한 존재의 소멸은 또 다른 하나의 생성이 되듯, 나는 존재의 종말과 시작을 본다. 몇 달 전 태아 사진에서 아주 작은 점으로만 보이던 아기가 자라서 우리 곁으로 왔다. 아기의 모습 속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도 있다. 아니, 어쩌면 몇백 년 전, 아니 그 훨씬 이전 우리 조상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덧없는 인생이라고 하나 영원을 느끼고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한다.
이제 산모에게 미역국을 끓여주는 것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맛있는 국물을 내는 한우 양지고기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 질 좋은 미국 소고기에 미리 멸치와 다시마 등으로 우려 놓은 국물을 붓고 미역국을 끓인다. 나는 하루 세끼 밥과 간식까지 챙기느라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1층에 있는 부엌에서 서성인다. 다행인 것은 부엌에서 호수가 한눈에 다 보이는 점이다.
바깥은 눈 폭풍이 몰아치는데 따뜻한 집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호수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는 것도 아늑해서 무척 좋다. 거위는 이 추운 날씨에 어디 있을까 하다가 어디 따뜻한 피신처를 찾았겠지 하고 생각하기로 한다. 추운 눈보라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면 마음이 굉장히 좋지 않았을 텐데 눈에 보이지 않으니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