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햇빛이 좋다. 기온은 낮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 따뜻하다. 그러나 호수에 거위가 오지 않는다. 캐나다 거위가 철새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사는 거위들은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겨울을 난다고 들었는데 벌써 며칠째 통 보이지 않는다. 온 세상이 하얗고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 다람쥐 두 마리가 아침에 소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집 앞을 내닫고 했다. 그러나 그 뒤 몇 시간째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정적이 계속된다.
호수가 얼어 있고, 풀밭은 눈에 덮여 있어 먹을 것이 없어서인가? 물속 풀이나 땅 위 풀을 먹고사는 초식동물인 거위는 이제 얼음이 녹을 때까지 오지 않을 건가? 살아있는 생물이 전혀 보이지 않고 조용한 오늘, 바깥풍경이 너무 적막하고 쓸쓸하다. 거위가 호수 풍경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모르겠다. 없으니 더 절실히 느껴지고 또 기다려진다.
오후 늦게 비가 내린다. 쌓인 눈 위에 내리는 비가 눈을 녹여 거위의 먹을거리를 줄 것 같아 반갑다. 빗소리를 들으니 ‘처마 끝의 빗소리는 번뇌를 멈추게 하고 산자락의 폭포는 속기를 씻어준다.’는 옛사람의 글귀가 생각난다. 조용히 비를 보고 있으니 시간이 천천히 가는 듯하고 여러 생각에 젖게 된다.
존 러스킨은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고 했다.
거위라면 거위 털 잠바나 거위 이불이 먼저 생각났다. 그런데 이제는 이 호숫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생명이 생각나고, 없으면 보고 싶은 사랑스러운 존재로 내 마음에 와닿은 것은, 그만큼 삶이 더 풍요로워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