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절망둑어가 돌아왔다. 몇 년 전, 악취가 진동하던 마산만 바닷물이 깨끗해지며 바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내 마음을 특히 사로잡은 것은 꼬시락이라 불리던 문절망둑어 소식이었다. '꼬시락',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는지,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옛날 내 고향의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봉암 다리 밑 그 깨끗한 바다에서 잡은 꼬시락이 최고라고 하시며 우리 아버지가 즐겨 드셨던, 진해 가는 길에 대통령들도 풍광에 반해 잠시 쉬면서 드셨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던 꼬시락회다. 봉암바다, 물 위에 떠 있는 정자처럼 생긴 횟집들은 마치 그림 같았다.
넓은 은모래사장과 속까지 훤히 비치고 찰랑거리던 얕은 바닷물이 눈에 선하다. 내 고향 마산, 집 앞에 호수 같은 바다가 있었다. 마산은 항구 도시였지만 내가 태어난 동네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조용한 어촌마을 봉암이었다. 마산만의 끝자락,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그곳은 해산물이 풍부하던 맑고 깨끗한 바닷가였다.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조상 대대로 살아오셨던 본관(本貫) 안동을 떠나 바닷가로 터를 잡은 것은 그 바다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바다였기 때문이다. 병이 난 삼대독자는 그 바다에서 나는 재첩과 같은 해산물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셨다 한다.
마산 바다는 이은상의 「가고파」 그대로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을 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였다.
입학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마산을 떠났다. 중 고등학생 때는 여름방학만 되면 해마다 고모님 댁이 있는 마산으로 휴가를 갔다. 어릴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만나 무학산 성호골과 가포해수욕장, 내가 태어난 동네까지 놀러 다니곤 했다.
1970년 후반,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 만에 마산에 갔을 때 그렇게 깨끗하고 맑았던 바다는 자유수출지역이 되면서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폐수로 죽은 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 바다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낙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가포해수욕장이 폐쇄되고 마산은 해수욕장 없는 해양도시가 되고 말았다.
결혼 후 오랫동안 고향을 찾지 못했다. 그리운 사람들이 다 떠나버린 고향은 마음속에만 그리움으로 간직하게 될 뿐 일부러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사람은 '갈 데 까지 가면' 깨닫고 돌아오는 것일까? 마산 바다를 살리자는 환경단체의 활동소식이 조금씩 들리더니 이제 문절망둑어 소식까지 들은 것이다.
신문 기사를 읽고 가보고 싶던 고향을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간다. 마산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후에야 더욱 애달프고 그리운 고향이 되었다. 내가 태어난 동네를 찾는다. 풍문으로 마을이 개발되어 많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그런데 정말 마을이 깡그리 없어졌다. 앞에는 잔잔한 바다, 뒤에는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던 참으로 아늑하고 정답던 동네가 간 곳 없이 사라진 것이다. 넓은 도로와 공장들만이 보인다. 낮아서 정다웠던 다리는 아취형의 높은 철제 다리로 바뀌어 있다.
농사짓고 고기 잡던 마을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곳을 한참 동안 서성거리다 원주민들이 집단이주했다는 낡은 아파트를 본다. 한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삼십 년 전 나라의 발전을 위하는 것이라면 불평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조상 대대로 살던 집과 농토까지 다 내어주고 작은 아파트 한 채와 약간의 보상금만으로 만족하며 이주했다. 이제는 고기를 잡을 바다도, 농사를 지을 땅도 없어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한다. 요새같이 보상금이 적다고 항의 같은 것은 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래사장과 갈대숲이 있던 자리에 봉암갯벌 생태학습장이 조성되어 있다. 다행히 그곳은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생태계가 많이 회복되고 있다. 원앙과 도요새, 붉은 부리 갈매기와 오목눈이가 살고 갯개미취와 나문재, 해당화가 피고 붉은 발말똥게와 우렁이와 문절망둑어까지 사는 곳이 되었다. 자신을 더럽히고 파괴할 때 침묵하고 있던 바다는 자신을 살리려는 사람들의 노력에는 자연의 놀라운 힘, 그 복원력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그 살아있는 생명들과 눈을 맞추다가 우리 할아버지를 살렸다는,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재첩도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