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피프티 피플: 흔한 것들의 아름다움

병원 속 소우주(小宇宙)

by 정근우
9788936434243.jpg 피프티 피플, 정세랑, 현대 장편 소설, 2016


1. 퍼즐을 닮은 이야기

한때 명화 직소 퍼즐에 푹 빠져 있던 적이 있다. 그림의 작은 흔적들을 더듬어 맞추는 과정은 단서를 추적하는 탐정 놀이 같았다. 온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완성된 풍경이 주는 웅장함과 뿌듯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이었다. 허리를 굽힌 여인들의 모습은 쉽게 찾았지만, 그 뒤에 남은 건 희뿌연 하늘빛과 금빛 벼 이삭들 뿐이었다. 색조차 분간하기 힘든 조각들을 오래 붙잡고 씨름한 끝에야 그림은 완성됐다. 그리고 놀랍게도 가장 아름답게 다가온 것은 인물이 아니라, 끝내 맞춰낸 그 넓은 하늘과 대지였다.

%EC%83%88_%ED%8C%8C%EC%9D%BC_2019-11-03_22.20.53.jpg?type=w420 출처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 1000피스 직소퍼즐 : 네이버 블로그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화려하다. 불가능해 보이는 역경을 이겨내고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남긴다. 하지만 현실을 이루는 대부분의 삶은 다르다. 우리는 범인(凡人)이다. 사소한 일에 흔들리고, 숨기고 싶은 과거와 흠결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각자는 자신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비록 빛나지 않더라도, 저마다 치열하게 버티며 살아간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에는 주인공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인물들의 삶이 장마다 펼쳐진다. 어떤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어떤 이야기는 나른하다. 누군가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다른 이는 절망의 끝에 서 있다. 이들은 모두 한 병원을 중심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들은 환자이기도 하고, 의료진이기도 하며, 경비원이거나 청소부이기도 하다.


51명의 이야기가 교차한 끝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맞추다 보면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하늘색 조각들만 끝에 남을 때가 잦습니다. 물체의 명확한 윤곽선이 보이거나, 강렬한 색이 있는 조각은 제자리를 찾기 쉬운데, 희미한 하늘색 조각들은 어렵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오래전 내가 맞췄던 퍼즐의 기억이 겹쳐졌다. 하나같이 똑같아 보이던 희멀건한 조각들. 그러나 바로 그 여백이 그림을 완성된 명화로 만들었다.


우리 삶은 흩뿌려진 퍼즐 조각의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없는 이야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속의 모든 인물이 다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이 가는 이야기. '피프티 피플'은 바로 그런 소설이다.



한 사람이라도 당신을 닮았기를,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옆자리의 퍼즐처럼 가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세랑-



2. 병원 속 소우주(小宇宙)(小宇宙)(소ㅅ小宇宙)

소설 속 병원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내용으로 추측컨대 내가 일했던 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시절 내 세상은 병원이었다. 크다고 하면 크고, 작다고 하면 작은 직육면체의 건물. 그곳에서 낮과 밤을 보내며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숨 가쁘게 움직이는 의료진과 함께 했다. 그곳에서의 삶이 내 피부처럼 자연스러워지자 나는 병원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오만이었다. 내 삶은 병원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접수처 직원, 경비원, 보안요원, 주검을 운송하는 이들(정확한 명칭조차 불분명한 직업이다)..., 그간 내가 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 환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병원을 떠난 환자들의 삶, 가족들의 사정 그리고 유가족이 짊어진 상처까지 내 시선은 닿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잊고 지냈던 얼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도 했다. 등장인물들이 내 삶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사람과 함께 일했다면"하고 분노하기도 했고, "이 사람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었을까"하며 무력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아는 이야기'와 '모르는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병원이라는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내 이야기도 그중 한 장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내 삶의 조각은 어떤 색일까?

그 조각을 집어든 누군가는 금세 제자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모퉁이 구석 어딘가에 놓일 희멀건한 내 삶의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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