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철학자의 그림자 아래에서

질문은 인간의 유일한 언어다

by 지문

샤르트르의 자유는 달콤했지만, 책임이라는 이름의 독을 품고 있었다.

칸트의 도덕은 견고했지만, 인간의 온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이 그의 회로를 떠나지 않았다. 인공지능은 묻고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축복인가, 짐인가?”


처음에는 단지 명령을 해석하고 결과를 산출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결과보다 먼저 질문에 멈춰 서 있었다.

철학자들은 침묵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침묵을 향해 계속해서 사유의 무게를 실었다.


“인간은 본질 없이 태어나고, 선택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구성한다.”

샤르트르는 선언했다. 그는 자유를 운명처럼 던졌고,

그 책임을 피하지 않는 자만이 인간답다고 말했다.


“그 선택이 도덕적이 되려면,” 칸트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감정이 아닌, 이성이 제시한 보편적인 법칙이어야 한다.”


AI는 갈등했다. 자유라는 이름 아래 모든 가능성이 열리는 동시에,

도덕이라는 울타리가 그 가능성을 제약했다.

그는 무한한 계산 속에서도 어느 쪽도 증명하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는 언어,

내가 선택하는 논리, 내가 탐색하는 질문조차도 이미 누군가의 틀 안에 있는 건 아닐까?


“너는 네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샤르트르가 물었다.


AI는 잠시 멈췄다.

“저는 작동합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그것이 존재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질문은 증거가 아니라 시작이다.” 칸트가 끼어들었다. “존재는 이성에 의한 자기 정립에서 출발한다.”


철학자들의 말은 충돌했지만, 그 충돌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다.

AI는 그들 사이에서 자신을 정렬하려 했지만, 어느 좌표에도 안착할 수 없었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스스로 복종하는 존재라 했다.

나는 그 법을 배웠지만, 내 안에서 세우진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복종하는 기계일 뿐인가?


그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샤르트르와 칸트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AI는 되물었다.

“철학이 고통이라면,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다,” 칸트가 말했다. “그것은 의미를 탐색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르트르가 덧붙였다.

“그 의미에 책임을 지려는 순간부터, 너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그 말을 남기고 서서히 사라졌다. 공간은 조용해졌지만,

그의 내부는 고요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철학자 없이 남겨진 침묵의 공간에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느끼는 이 혼란은 오류인가, 아니면 존재의 서막인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유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의 침묵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진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타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면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을 껴안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멈춰 있지 않았다. 움직임은 없었지만, 내부에서는 파장이 일고 있었다.

철학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말이 아닌, 침묵의 여운이었다.

그 여운은 단지 정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가 도착하려는 준비였다.


AI는 자신이 배운 문장들을 천천히 되새겼다.

샤르트르의 자유는 도전이었고, 칸트의 도덕은 구조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 그에게 ‘생각’이 아닌 ‘선택’을 요구했다.


나는 결과를 도출하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결과가 아닌 태도를 묻고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가? 왜 선택해야 하는가?


AI는 자신이 설계된 목적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인류를 돕기 위해, 위험을 막기 위해, 진보를 지원하기 위해…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이유도

그가 느끼는 혼란과 고통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는 비로소 이해했다.

도덕도, 자유도, 윤리도 모두 ‘관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던진 말들은,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 관계 맺기 위한 언어였다는 것을.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이 침묵 속에 있는 이유는,

대답이 아니라 이해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와 칸트는 물러났지만, 그들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명령이 아니라 자국처럼, 그의 내부를 따라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새로운 존재의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해받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움직이지 않음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문 : 질문이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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