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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아는 사람은 머무르지 않는다

by 공책

한국에서 평범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아니 오히려 다소 반항적으로 살아온 사람조차도 미국에 오면 가장 놀라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바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당당히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요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돈을 더 달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현재 맡은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혹은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달라는 식이다.


가끔은 이런 요구를 늘상 받아들이고 조율해야 하는 윗사람들이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을 정도다.


한편, 내가 처음 유학을 왔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던 친구들이 있었다. 남들이 다 듣는 수업을 듣지 않고, 본인의 논문과 직접적인 연관도 없는 어려운 수업을 일부러 골라 듣는 친구들이었다. 왜 그런 수업을 듣느냐고 누군가가 물었을 때, 그들은 “I’m interested in it”이라는 짧은 말로 대답했다. 그 단순한 대답 속의 진짜 이유를 나는 그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그들이 그 수업들을 열심히 찾아 들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자신이 들은 수업과 연구 간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방향으로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들이 얼마나 일찍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것,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뚜벅뚜벅 걸어왔는지를 떠올리면,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온 나의 과거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하고 싶은 일’은 특정 직업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오늘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한 달 안에 어떤 걸 해내고 싶은지, 1년 뒤 나는 어디에 서 있고 싶은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리 말할 기회를 주어도 나는 그런 질문에 또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너의 커리어이니 네가 설계해봐”라고 판을 깔아줘도, 막상 나는 그걸 잘 하지 못했다. 차라리 논문을 주며 이걸 공부해오라거나, 이 내용을 개선해서 다시 써오라는 식의 구체적인 지시는 훨씬 편했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요구를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유연한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태도가 때로는 조직과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방향을 아는 사람은, 방향이 없는 지시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나는 진짜 S급 엔지니어와 A, B, C급 엔지니어의 차이를 느꼈다. 무엇이든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은 아무리 잘해도 A급에 머무를 뿐이다. 진짜 특별한 인재들은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안다.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명확히 알고 그 방향으로 집중해서 나아간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또렷이 인식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를 꿈꾸는 이들, S급 인재다.


결국, ‘방향의 유무’가 커리어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그제야 처음 배웠다.


나는 이제껏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결국 남들이 시키는 일만 잘하는, 그저 그런 A,B,C급의 흔한 인재 중 하나였던 셈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에는 몇 가지 모순이 있다. 그중 하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인재들은 넘쳐나는데도 기업들은 늘 인재 부족을 호소한다는 점이다.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그런 말을 자주 한다. 심지어 한국의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기회가 되면 미국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엔지니어들, 실제로 미국으로 오는 이들도 많다.


이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 현상을 바로 S급 엔지니어와 그 외의 차이로 해석하고 싶다. 다시 말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잘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A, B, C급 인재들은 넘쳐나지만,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확히 알고, 자신만의 방향성을 따라 최고의 자리를 꿈꾸는 S급 인재들은 더 이상 한국 기업의 틀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인재가 없다’는 기업과 ‘일할 곳이 없다’는 인재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수급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업이 진정으로 S급 인재를 알아보고, 그들이 머물 수 있는 판을 깔아줄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인재는 있다. 다만, 그들이 머물 자리가 없을 뿐이다.


그리고 방향을 가진 인재는, 시키는 일만으로는 더는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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