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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사회, 시험에 갇힌 청춘

by 공책

미국 유학 첫 학기에 수강신청을 하던 그때 주위에서 들은 조언이 있다. “이 수업은 취업할 때 도움이 돼” 혹은 “그건 나중에 쓸모없어” 같은 조언들이 오갔다. 더 나아가서 석사, 박사 주제를 잡을 때 보다 현업에서 바로 쓰일 수 있는 실용적인 주제를 잡으라는 조언들도 많이 들었다. 나는 그 조언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막 미국에 건너온 내게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조언들이었다. 아니, 회사가 내가 들은 수업까지 꼼꼼히 본다고? 내가 쓴 논문들도 다 본다고? 대체 어떻게?


고집이 센 나는 결국 한국에서 하던 대로, 학점이 잘 나오는 수업과 시간 대비 효율적인 수업을 골라 수강해 좋은 성적을 받았다. 논문 주제도 그저 교수가 추천한, 써보기 쉬운 주제를 별다른 고민 없이 골랐다.


이게 뭔가 잘못됐다는 인식은 바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인턴을 찾을 때였다. 미국에서는 사람을 뽑을 때, 입사하자마자 바로 기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업무에 바로 적용 가능한 실질적인 역량이 있는지를 가장 먼저 살펴봤다. 아무런 실질적인 경력이 없던 나는 보다 현업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가르쳐주는 수업을 듣고, 현업과 최대한 가까운 논문 주제를 택했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스펙 쌓기를 미국식 실용성과 혼동했던 것이 내 실수였다.


물론 어딜 가나 교육은 어느 정도의 스펙 쌓기, 그리고 실제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운다는 두 가지 목적이 혼재한다. 하지만 그 정도를 비교하자면 한국의 교육은 스펙 쌓기에 보다 더 집중되어 있다. 어느 학교에서 어떤 학점으로 무슨 전공으로 졸업했느냐? 혹은 공기업 등을 준비한다면 NCS와 같은 시험을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시 말해, 수업을 듣고 학점을 받는 일은 배우기보다는 스펙을 위한 경우가 많다. 그것이 실제로 현업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모른 체. 아니 심지어 활용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체로.


반대로 미국의 경우 교육은 시간과 돈이라는 큰 비용을 투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현업에서 필요한 실용적인 지식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되거나, 그럴 것이라고 믿는 수업을 선택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된다.


물론 어떤 교육제도이던지 간에 스펙 쌓기와 실용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이 더 중요하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다. 동시에 실제로 대체 이건 어디에 쓰는 것일까 모른 체 배우는 수많은 지식들, 예를 들어 미적분과 같은 것들은 현업 엔지니어로 일하는 나에게는 매일 쓰는 수학적 도구이다. 그래서 그때는 왜 배우는지 몰랐어도 학교 다닐 때 잘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은 스펙 쌓기가 실제 교육의 목적을 압도하는 사회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지금 현실을 사는 청년들의 좌절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재수, 삼수를 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애쓰고, 편입을 시도하고, 공무원 시험과 같은 시험에 몇 년을 투자하는 등. 수험이 끝나면 실제로 활용될지조차 모르는 공부들로 청년들의 시간은 소모되고 있다.


물론 한국 사회도 이런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해결책은 엉뚱하게 나오는 것 같다. 바로 그 시험을 탓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을 못 봐도 지역인재라는 이름으로 공기업에서 채용을 해준다거나 혹은 수능을 무력화시키고 학생부 종합평가라는 제도를 들여와 시험 그 자체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공정한 경쟁을 해칠 뿐만 아니라, 시험 중심 경쟁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사실 한국이 이렇게 시험에 목매달 수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이라는 것이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와 같은 전문직이 되거나, 남들이 말하는 좋은 대기업, 공기업 등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다음에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바로 이런 기형적인 구조가 교육을 스펙 쌓기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문제의 원인은 외면한 채, 시험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며 이를 무력화시키자 오히려 공정성 훼손이라는 큰 사회적 논란을 낳았고, 결국 청년들은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됐다.


나는 때때로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편이다. 한 방송에서, 한 정치인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회의 가장 구조적인 모순은 바로 기업 간의 불균형이며, 우리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아, 이 사람은 정말 한국 사회를 구조적으로 바라보고 있구나. 단지 그때그때 불거지는 문제를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균열을 보고 있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그 정치인의 문제 제기는, 곧이어 터져 나온 정치 공방과 갈라진 목소리들 속에 묻혀버렸다. 급한 현안에 묻혀, 중요한 통찰은 언제나 뒷순서로 밀려난다.

그 순간, 나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을 본 듯했다.


한국 교육 문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 그리고 그 모순의 해결을 통해 교육을 정상화하고, 청년들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는 시험을 무력화시키고 스펙 쌓기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일의 극복 없이는 한국 사회는 청년의 절망으로 뒤덮인 미래가 없는 사회로 가는 것이 자명해 보인다.


극단적으로 낮은 출산율과 그냥 쉬는 청년들. 이 사회가 이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미뤄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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