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대학원에서 나는 디지털 설계와 관련된 여러 과목들을 배운 적이 있다. 조금만 설명하자면, 이 과목들은 오직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우리가 구현하고자 하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이다. 복잡한 시스템을 빠르게 파악하고, 철저히 논리적으로 구성된 0과 1의 언어로 구현하는 작업. 나는 나름 논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오로지 논리만 존재하는 세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졸업 후, 실제로 그 분야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을 보면 존경심마저 들었다. 0과 1이라는 극도로 추상화된 언어로 복잡한 시스템을 짜내는 능력. 그들은 진짜 대단했다. 내가 그 분야를 선택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아마 그 일을 했으면 스트레스로 진작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반면, 내가 하는 업무는 이진수가 아니라 미적분을 매일같이 사용한다. 0과 1의 언어로 복잡한 시스템을 구현하기 보다는, 전체 시스템을 보고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자질로 여겨진다. 디지털 설계를 맡는 엔지니어 중 일부는 또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난 저 일은 절대 못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유사한 전공을 공부했고,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실상 우리 서로는 굉장히 다르다. 외부인의 눈엔 비슷한 엔지니어로 보일지 몰라도, 내부에서는 각자의 성향과 전문성이 분명히 구분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 차이는 오히려 더 강해진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어떤 사람은 더 빠르고 쉽게 처리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그 일을 맡게 된다. 결국 적성과 특성에 따라 업무는 더 명확히 분화된다. 물론 협업 능력 또한 함께 향상된다. 그래서 엔지니어들에게 중요한 직업적 고민은 ‘자신의 전문성을 얼마나 넓힐 것인가, 또는 얼마나 좁힐 것인가’다. 너무 넓히면 어느 한 분야에서도 깊이를 갖기 어려워지고, 너무 좁히면 자신의 역량을 펼칠 기회 자체가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사람마다 적성이 다르기에, 인류는 오늘날처럼 찬란한 과학 기술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낸 개개인의 능력이 모여, 지금의 기술 문명이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다양성은 인간 진보의 조건이자, 동시에 제국의 특징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도 외형적인 다양성은 확실히 늘었다. 여전히 동질감이 강한 사회지만, 다문화를 존중하려는 분위기,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생활하는 모습은 확연히 달라졌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 다양성이 진짜 다양성을 의미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짜 다양성은 바로 ‘적성과 능력’의 다양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는 이 측면에서 매우 일관된 기준을 가진 사회다.
능력의 다양성이 실현되기 위해선, 평가자가 다양한 사람이어야 한다. 한 명의 시각이나 기준만으로는 각기 다른 특성과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평가자가 되어야, 각 개인의 잠재력과 적성이 올바르게 드러날 수 있다. 단일한 평가자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구조는 필연적으로 왜곡된 시각을 낳는다. 그만큼 평가의 기준이 다양해져야, 진정한 의미의 다양성과 개개인의 고유한 가치를 온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입시는 점점 역행하고 있다. 과거에는 수학, 과학 경시대회 등 외부 평가도 반영됐고, 수능도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문제로 학생을 평가했다. 완벽하진 않아도 지금처럼 ‘학교 내신’이라는 폐쇄된 기준보다 훨씬 나았다. 내신 성적은 극소수의 교사에 의해 평가되므로, 평가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퇴보다. 공교육을 강화하고 사교육을 줄이겠다는 명분은 매번 등장했지만, 매해 사교육 지출이 역대 최고를 찍는 현실은 이를 반증한다.
사회로 나가면 문제는 오히려 더 뚜렷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이름표는 여전히 극히 제한된 몇몇 직업군에만 붙는다. 전문직,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 사실상 이 네 가지가 거의 전부다. 이처럼 평가 기준이 단조롭다 보니, 평가자도 자연스레 소수로 수렴된다. 문제는 그 틀에서 벗어난 능력은 아예 평가의 장에 오르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기여하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다양한 재능이 사라지는 사회, 다양성이 말라버린 생태계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 글, ‘배우지 못한 사회, 시험에 갇힌 청춘’에서 나는 이런 구조가 교육을 왜곡하고 청년을 파괴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건 평가자의 수가 적어짐으로써 능력의 다양성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물론 직종 간이나 기업 규모 간의 연봉 격차는 분명 윤리적 문제이며, 사회적 연대나 공동체 의식에도 균열을 가져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보다 더 본질적인 위험은 그것이 능력의 다양성을 구조적으로 파괴한다는 데 있다. 보상 체계가 특정 직업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점점 그 방향으로만 몰려든다. 이는 단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아직 피어나지 못한 재능들이 조용히 꺾이고, 다른 경로를 향한 탐색 자체가 ‘비합리적’ 선택이 되어버린다. 결국 불균형한 보상은 불공정함을 넘어, 미래를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는 집단적 상상력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과학 기술계는 항상 인재 부족을 겪는다. 그 이유로 흔히 ‘과학기술인에 대한 홀대’, ‘연구 인프라 부족’ 등을 이야기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르다. 기술 분야는 언제나 시간차를 겪는다.
예를 들어 지금은 인공지능 분야가 가장 ‘핫’하다. 머신러닝 엔지니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등이 수요가 폭발하고 있다. 이들은 확률, 통계, 행렬 등을 잘 다뤄야 하고, 파이썬 같은 언어도 익숙해야 한다.
하지만 15년 전만 해도 아무도 통계학과가 이렇게 각광받을 줄 몰랐다. 컴퓨터 언어의 중요성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 시절 컴퓨터과학 학과들의 입시에서의 위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초기 인공지능 이론을 만들던 연구자들조차 그 이론이 어떤 시점에 꽃필지는 그 이론을 만든 자신들조차 몰랐을 것이다.
반면, 인재를 키우는 데는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학사, 석사, 박사만 해도 10년, 게다가 한국의 경우 병역 문제까기 있기에 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 학위를 받은 후 실무 경험까지 더하면 15년은 훌쩍 넘는다. 따라서 수요는 당장 급한데, 인재를 길러내는 시간은 너무 길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 지금 인공지능이 중요하다고 모든 아이를 머신러닝 인재로 키운다면, 15년 후 그들의 자리는 얼마나 남아있을까? 우리는 전혀 다른 능력을 요구하는 산업이 떠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해법은 단순하지만, 근본적이다. 애초에 능력의 다양성이 고사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 그 기반을 설계해야 한다. 이는 ‘공정한 분배’라는 선언 이전에, 생존을 위한 전략이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공기업과 전문직 사이의 처우 격차가 극심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적성과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사회는 재능의 자연스러운 분화를 잃는다.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게 되고,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만 향할 때, 기술 생태계는 취약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방향이 바뀌면, 아무도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단지 아름다운 가치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구조적 보험이다.
기술 산업은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반팔을 입은 사람, 우산을 든 사람, 외투를 챙긴 사람이 모두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효율’을 생존 전략으로 택해왔다.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특정 기업에 ‘몰빵’했고, 다행히도 훌륭한 사람들이 그 전략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독히도 운이 좋았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자원을 '몰빵'하는 전략은 조금만 날씨가 달라져도 언제든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날씨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여정에서, 지금 날씨가 더우니 모두가 반팔만 입고 가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연봉 격차를 말할 때 우리는 으레 양극화와 청년의 박탈감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일 뿐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지금, 기술의 기후가 언제 어떻게 뒤바뀔지 모르는 세상에서 단 하나의 옷차림으로, 버틸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