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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맡긴 나, 흔들리는 사회

by 공책

여러 회사에서 해고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내 주변 사람들도 그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해고된 이들의 태도는 참 다양했다. 어떤 이는 분노했고, 어떤 이는 좌절하며 고개를 숙였으며, 또 어떤 이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심지어 평온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과연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보통 실력이 뛰어나고 어디서든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은 대체로 평온해 보였다. 그들의 평온함은 '어디서든 다시 취업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담담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이 일하던 조직에서 버려진 건데.


혹시 이들은 정말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멘탈의 소유자인가? 아니면 평온한 척하는 연기자들인가? 만약 연기라면, 그들은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오스카 시상식 무대에 서 있어야 할 텐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해고를 통보받는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솔직히, 속으로는 엄청 화가 날 것 같다.


하지만 해고된 이들이 그저 자리를 옮겼을 뿐, 이전처럼 똑같이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이들은 어디서 일하느냐보다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했던 사람들이구나. 자신이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고, 그래서 해고가 그다지 큰 상처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조직에서 버려지는 것이 마치 오장육부가 파열되는 교통사고처럼 느껴졌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길을 걷다 나뭇가지에 손이 살짝 긁힌 것처럼 사소한 일이었다. 조금 따끔하지만 여전히 갈 길을 가며,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남지 않는.


미국에 와서 정말 신기하게 느낀 문화가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야", "나는 컴퓨터 아키텍처를 해"라는 식으로, 자신이 하는 일로 자신을 설명했다. 그 뒤에 자연스럽게 "어디에서 일한다"는 정보가 덧붙여졌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하는 일'과 '맡은 역할'에서 찾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자기소개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사실 한 번도 없다. 대부분 "어느 회사의 누구입니다", "과장입니다", "차장입니다" 같은 식으로, 소속과 직급을 중심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이 차이가 단순히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 때문일까? 물론 한국은 미국보다 집단주의적이다. 하지만, 소속된 집단 없이 자신을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집단주의적인가? 집단주의라면 개인이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과연 그런가? 해고를 "회사를 위한 일"이라며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국가라는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을까?


오히려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라기보다는 관계주의에 가까워 보였다. 상사의 눈치를 보고, 주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 문화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을 누구 밑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지 않고, 회사 이름과 직급을 내세우며 자신을 소개할까?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이 속한 조직을 통해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회사에 다닌다", "나는 어떤 직급이다"라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자부심이 된다. 심지어 자신이 사는 동네나 연봉도 정체성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연봉이나 집값을 은근슬쩍 대화도중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들이 특별히 물질적이라 서라기보다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 때문일 것이다.


정체성이 어디에 있든 그것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문제는, 우리의 정체성이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정체성을 외부에 맡겨 버리면, 외부 변화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집값이 정체성인 사람은 집값 하락을 받아들일 수 없고, 연봉이 정체성인 사람은 연봉이 낮아질 정책을 결코 수용하지 못한다. 회사가 정체성인 사람은 해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약간의 정책 변화에도 이익집단들이 서로 격렬하게 대치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이는 우리가 지나치게 물질적이어서가 아니라, 정체성을 외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점점 극단적인 안정감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 간다.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주거, 안정적인 연봉. 물론 안정적인 사회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안정적이라는 것은 때로 정체를 넘어 퇴화를 의미한다. 변화하는 기술과 세계 속에서 오로지 안정감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사회 전체가 안정적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경쟁력을 잃어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강력한 리더가 나타나 극렬한 대립을 해소하고 정책을 밀어붙이길 바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소통하는 리더가 등장해 갈등을 조정하길 원한다. 둘 다 해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해법이 있다. 바로 우리 모두가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외부 변화에도 끄떡없는 정체성.


자신이 매일 하는 일에서 정체성을 찾으면 더 안정적이다. 자신이 하는 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정체성을 찾으면 더욱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건 자기만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거기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결국, 질문은 여기로 수렴된다.
나는 누구인가.
바뀌는 세상 속에서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사회 전체를 향한다.
우리 사회는 무엇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하고 있는가.
외부의 변화, 외부의 평가 앞에서도 꿋꿋이 설 수 있는 공통의 자아가 존재하는가.

아니, 우리는 진짜 우리였던 적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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