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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은 안에서 타오른다

by 공책

처음 미국에 와서 유학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선배들에게 물어본 말이 있다. “우리 연구실은 출석 체크도 안 하고, 언제 와야 하는지, 언제 집에 가도 되는지도 아무 말이 없는데, 그럼 진짜 아무 때나 출근해도 돼요?”라는 질문이었다. 그때 선배는 “그냥 적당히 눈치 봐서 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이 나에겐 더 큰 혼란으로 다가왔다.


아마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거나, 현지에서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각 체크도 없고, 퇴근 시간도 따로 없으며, 어떤 경우에는 회사에 출근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그럼 내 근무 태도는 누가, 어떻게 관리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현지에서 취업해 근무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이제는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적당히 눈치 봐서 해’라는 말은 곧 ‘근무 태도 같은 건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너의 부재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스스로 잘 판단하라’는 의미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근무 시간을 따로 측정하지 않는다. 어떤 회사는 일주일에 몇 번만 출근하면 되고, 어떤 날은 아예 출근하지 않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몇 시에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하는지도 따로 확인하지 않는다. 그저 일을 잘하면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 패턴에 맞춰 시간을 유기적으로 관리한다. 아이가 어린 사람은 매일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데리러 가고, 그 대신 집에서 늦게까지 일한다. 반면, 늦게 출근해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미팅을 빠뜨리거나, 마감 기한을 반복해서 어기지만 않는다면, 몇 시간 일했는지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이 시스템이 무조건 편한 것만은 아니다. 근무 태도가 평가 대상이 아닌 만큼, 특별한 문제가 없는 이상 자신이 약속한 결과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최선을 다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는 말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은 근무 태도를 촘촘히 평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미국은 결과 중심의 평가 방식을 정착시켰을까? 이 시스템은 조직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여기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한국은 해고가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대신 근무 태도를 꼼꼼히 본다는 시각도 있고, 미국은 상대적으로 신뢰 사회이기 때문에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고가 어렵다고 해서 결과 없이도 용납된다는 뜻은 아니며, 동시에 미국이 무작정 근로자를 믿는 허술한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차이를 보다 근본적인 질문, ‘사람을 어떻게 동기부여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보고 싶다.


인간의 동기는 크게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로 나뉜다. 내재적 동기는 스스로 하고 싶거나 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생기는 동기이고, 외재적 동기는 칭찬, 보상, 혹은 불이익을 피하려는 욕구에서 생기는 동기다. 우리는 언제나 이 두 가지 동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어떤 동기를 더 자극하느냐, 어떤 동기를 더 우선하느냐에 따라 시스템은 달라진다.


한국은 외재적 동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출퇴근 시간, 근무 시간, 정해진 목표 등 외부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평가받는다. 반면, 미국은 상대적으로 내재적 동기를 자극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개인의 목표와 회사의 업무를 일치시키려 하거나, 일의 결과만을 중시하고 개인이 스스로 책임지도록 유도한다.


물론 어떤 시스템이 더 낫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결과만 보는 평가 방식은 운이 개입될 여지가 크고, 반대로 노력과 과정이 정당하게 인정받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성과 위주의 평가 방식이 공정하다 라는 주장에 늘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평가의 공정성 문제와 별개로, 내재적 동기를 더 자극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외재적 동기보다 내재적 동기가 더 강력한 동기라는 건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다. 심지어 강한 외재적 동기는 오히려 개인의 내재적 동기를 죽이기도 한다. 계속해서 외부에서 출근 시간을 체크하고 일을 지시하면, 스스로 잘해보고자 했던 마음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미국 근로자들이 자기계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감, 개인주의적인 경쟁 시스템, 그리고 능력에 따른 강력한 보상체계가 자기 개발을 촉진하는 주요 원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도 그들의 진도를 체크하지 않고, 누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기개발을 지속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더 나은 기회를 추구하거나 자신이 하는 일을 더욱 잘하고자 하는 강력한 내재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외재적 동기로 무장된 사람보다 내재적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 승진이나 상사의 눈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보다, 자기 일에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 전체가 더 건강해질 것이다.


신상필벌, 공정한 보상과 처벌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이제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더 깊은 에너지, 내면의 불꽃에 주목해야 한다. 외부의 상과 벌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상이 없어도, 벌이 없어도, 그 일의 본질과 가치를 스스로 깨달아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유연하고 강인해진다. '공정한 사회'를 넘어, ‘동기부여된 사회’, ‘내면에서 출발하는 사회’.


공정은 시작일 뿐, 진짜 변화는 거기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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