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60대 엔지니어는 낯설지 않다. 반면, 한국에선 이미 은퇴했을 나이다. 물론 사람마다, 업계마다 차이는 있지만, 통계적으로나 주변 사례를 봐도 미국의 엔지니어들은 비교적 늦은 나이까지 일한다. 미국이 고령의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구조야말로 자국 경제의 지속적 성장의 기반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일정 나이가 지나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퇴출당하는 문화가 존재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어떻게 50대, 60대 엔지니어들이 여전히 이직하며 현업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을까?
먼저, 법적인 차이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는 나이를 이유로 한 고용 차별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이력서에 생년월일을 기재하게 하거나, 일정 연령 이상의 지원자를 걸러내는 방식은 심각한 법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채용 문서에서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단지 법이 무서워서 고령 엔지니어를 고용하는 것은 아니다. 법은 최소한의 기준일 뿐이고, 실제로 나이든 전문가들이 계속 일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지닌 전문성과 실질적인 기여 가능성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핵심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Transferable Skill", 즉 어느 조직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깊이 있는 기술과 지식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회로나 반도체 설계처럼 산업 전반에 걸쳐 수요가 있는 능력은 어떤 회사에서도 즉시 활용 가능하다. 이런 기술은 단기간의 교육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년간의 경험과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형성된다.
기업이 고령 엔지니어를 고용하는 이유는 단순한 경력 연수가 아니라, 그들이 쌓아온 전문성의 깊이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물론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해고 역시 단호하다. 미국은 고용이 자유로운 대신, 실력으로 평가받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그렇다면 단지 오랜 기간 일했다고 해서 전문가가 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고령 근로자가 모두 환영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내 대답은 단호하다. 경력이 많다고 해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 실력 있는 전문가는 대부분 경력이 많다.
즉, 오랜 경력은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더 필요하다. 하나는 개인의 의식적인 노력, 다른 하나는 조직의 성장지원 구조다.
개인이 아무리 오랫동안 일해도 그 시간이 루틴한 반복에 불과하다면 실력은 늘지 않는다. 단지 나이만 들어갈 뿐이다. 반면 자신의 일을 더 깊이 파고들고, 새로운 시도를 하며,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그 시간은 전문성을 쌓는 자산이 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조직 차원의 배려와 지원이다. 예전에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이 회사는 이름은 없지만 진짜 좋은 회사야. 전공을 정말 깊게 배울 수 있어.”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런 대화가 흔하다. 반대로 “그 회사는 절대 가지 마. 배울 게 하나도 없어.”라는 말도 종종 들린다.
즉, 내가 이 조직에서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느냐, 내 노동 시간이 단지 조직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 자신의 발전으로 이어지느냐는 질문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복지나 연봉을 넘어, 고용주를 평가하는 핵심 기준으로 작용한다.
결국 고령 근로자를 사회의 짐이 아닌 진짜 전문가로 만드는 일은,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조직의 철학에 달려 있다. 근로자의 시간을 그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지식과 실력이 쌓이도록 만드는 것. 때로는 조직의 단기 효율을 희생해야 하더라도, 이러한 성장의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혜택으로 돌아온다.
한국에서도 고령화가 가속되면서 정년 연장 논의가 활발하다. 하지만 그것이 공무원이나 공기업 같은 안정된 직군 외에 일반 사기업에까지 실질적으로 적용되기는 쉽지 않다.
진짜 정년을 연장하고 싶다면, 경력 있는 근로자가 계속해서 자신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조직은 그들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그 시간은 다시 사회의 자산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우리는 '오래 일하는' 사회가 아니라, '오래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