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노동시장과 직장문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이직’이다. 앞선 글인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에서 이직을 중심으로 노동시장을 들여다봤다면, 이번에는 이직이 직장 문화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미국의 엔지니어들은 정말 자주 회사를 옮긴다. 평균 3~5년 주기로 이직하고, 같은 회사 안에서도 부서를 바꿔 새로운 일을 경험하곤 한다. 혹은 승진을 통해 커리어를 확장한다. 한 자리에 5년 이상 머무는 경우는 오히려 경력 관리에 실패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래서 한 명의 엔지니어가 40년 동안 열 개 넘는 회사를 거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이직은 때로 반갑고 때로 위협적이다. 외부에서 실력을 다진 인재가 합류하면, 기술력뿐 아니라 그가 몸담았던 조직의 시각과 문제 해결 방식, 기술에 대한 통찰까지 따라온다. 단순히 한 사람을 채용한 것이 아니라, 회사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릴 기회를 얻는 셈이다.
하지만 반대 상황도 있다. 조직의 중심에 있던 인재가 갑작스레 회사를 떠난다고 할 때, 이직은 곧 위협으로 다가온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은, 회사가 직원의 처우를 쉽게 낮추지 못하게 만든다. 오히려 대우를 올려서라도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엔지니어의 처우가 유난히 좋은 이유다.
근로자의 입장에서도 이직은 중요한 선택이다. 사람들이 이직을 결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자신의 성과에 대한 보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그 이유가 될 수 있다. 인간관계나 승진 실패 같은 정서적인 요인도 적지 않다. 때로는 다음 기회가 자신에게 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만으로도 조용히 이직을 준비한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이유는 결국 연봉과 커리어다. 연봉을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직이고, 동시에 새로운 업무를 통해 경력의 폭도 넓힐 수 있다. 예컨대 한 회사에서는 CPU만 설계했지만, 다음 회사에서는 GPU까지 맡을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직이 쉬운 구조는 근로자에게 수많은 이점을 제공한다.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경험, 그리고 조직 내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는 유효한 출구. 대부분의 갈등은 ‘떠날 수 있다’는 조건만 갖춰져도 훨씬 덜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고 다시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도 따르지만, 그 과정이 곧 성장이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검증된 인재를 잃는 것은 분명 손해다.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른 조직의 실력자를 데려올 수 있다면, 그 손해는 곧 기회로 바뀐다. 이직은 회사를 떠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역량을 끌어오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나아가 이직은 산업 간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기차는 수많은 반도체가 집약된 기계다. 반도체 기업은 단순히 설계에 능한 인재뿐 아니라, 전기차 구조에 대한 통찰을 지닌 전문가를 필요로 한다. 이때 가장 좋은 선택은 자동차를 설계하던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것이다. 그는 반도체 설계에 대해선 처음일지 모르지만, 전기차라는 시스템을 보는 시야는 기존 인력과 전혀 다르다. 회사는 새로운 시각을 얻고, 그는 자신의 전문성을 더 깊고 넓게 확장할 수 있다.
이직 문화는 단기적으로는 회사와 개인 모두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문화는 모두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근로자는 스스로의 가치를 높일 수 있고, 회사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닌 인재를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엔지니어 처우는 상대적으로 낮을까. 단순히 기업의 악의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고용했고, 쉽게 떠나지 못할 사람에게 굳이 파격적인 대우를 제공할 유인이 부족한 구조 때문이다. 반대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구조가 갖춰지면, 기업은 자연스럽게 처우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결국 이직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제도다. 예를 들어, 경쟁사로의 이직을 막는 계약은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기술이나 아이디어 유출이 문제라면, 이를 제한하는 별도의 조항을 두되, 이직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산업의 유연성을 가로막는 구조는 결국 우리 사회 전체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또 하나는 평판 조회 관행이다. 여전히 많은 회사들이 이직자의 전 직장에 전화해 평판을 확인한다. 이는 법적으로 금지돼야 한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실력과 태도를 봐야지, 누군가의 말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평판 확인이 꼭 필요하다면, 이직자가 직접 추천인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이직은 누군가에겐 회사를 떠나는 일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새로운 조직과의 연결이다. 단기적으로는 불안정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개인도, 회사도, 사회 전체도 성장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이 흐름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이직을 막는 건 인재 유출을 막는 것이 아니라, 인재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다.
그리고 이 흐름을 이해하고, 유연한 제도로 연결해주는 일.
그건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