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동시장을 진짜로 이해하고 싶다면, ‘해고’보다 ‘이직’을 봐야 한다. 해고는 언제나 뉴스가 되지만, 이직은 문화다. 미국의 직장인들은 더 나은 기회가 있으면 옮기고, 기업들은 이를 당연한 전제로 채용과 조직 운영을 설계한다. 미국에서 이직은 개인의 생존 전략이자 커리어 성장의 핵심 수단이다.
한국도 요즘 이직에 대한 시선이 예전보다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한 직장에서 오래 다니는 것이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커리어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미국의 경우 한 직장에서 10년 20년 다닌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능동적으로 커리어를 관리하지 않았다고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또 경험과 시각이 한정적이라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물론 얼마 다니지도 않고 회사를 매년 옮겨 다니는 것은 미국에서도 마이너스 스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3-5년 정도 한 회사에서 충분히 기술과 지식을 습득 한 뒤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아주 좋은 커리어 체인지로 비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제 퇴직한다는 나이인 50대가 되어도 60대가 되어도 이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커리어를 위한 조언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너의 자리에서 편안해지지 마라, 때가 되면 옮기라 라는 조언이다. 한 회사에서 이미 익숙한 일에 편안함을 느끼고 생각 없이 회사를 계속 다니다가는 그것이 곧 커리어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자신의 커리어를 설계해야 한다.
때문에 해고 소식보다 더 자주 듣는 소식은 누가 이번에 어느 자리에서 어느 자리로 이직한다는 소식들이다. 미국에서 꽤 오래 일했다는 엔지니어들의 경력 사항을 보면 평생 동안 10군데 혹은 그 이상의 다양한 회사들을 옮겨 다니며 일한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특히 엔지니어링 또는 테크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직은 더 흔하다.
이렇게 미국의 노동시장에서 이직이 활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직이 왜 이렇게 쉽고 또 잘될까?
먼저 한눈에 들어오는 표면적인 이유를 찾자면, 미국의 빈번한 해고가 이런 이직 문화의 한 원인이다. 내가 언제든 해고될 수 있으니 나도 언제든 회사를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연봉 협상 구조다. 한국은 직함과 호봉에 따라 연봉이 정해지지만, 미국은 협상이다. 더 많이 주는 곳이 있다면? 당연히 옮긴다. 회사는 맞춰주거나 놓친다.
하지만 이직은 근로자가 그냥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직을 받아주는 입장에서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젊고 싼 노동력보다, 다른 회사들에서 경력을 쌓은 나이가 조금 더 들었고 더 비싼 돈을 줘야 하는 경력자를 훨씬 더 선호해야 이러한 이직 시장은 형성되게 된다. 다시 말해 미국의 노동시장에서는 이직시장이 매우 크고 활발하며 고용주들에게 자신에게 필요한 근로자를 뽑기에 적합한 시장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커다란 이직 시장의 키워드는 바로 transferable skill이다. 직역하면 ‘옮길 수 있는 기술’. 하지만 그 진짜 의미는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다.
어떤 직장에서 어떤 직무를 맡던지 필요한 직무에 필요한 지식과 능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 회사 안에서만 쓰이는, 즉 폐쇄적인 지식과 기술이다. 내부 전산 시스템, 업무 절차, 조직 문화 같은 것들이다. 다른 하나는 어느 회사에 가더라도 쓸 수 있는 지식과 기술, 즉 transferable skill이다. 예를 들어, 파이썬을 잘 쓴다거나, 디지털 회로 설계 능력이 탁월하다거나 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회사내부에서만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단지 회사는 이 사람이 이 내부 시스템을 익히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며 그것이 곧 회사의 비용이라는 단점이 존재한다.
또 다르게 필요한 지식과 능력은 바로 어떤 회사를 가던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본질적인 능력이다. 앞서 말한 transferable skill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디지털 설계를 하는 것이 그 직무인 사람은 디지털 회로를 잘 알아야 하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사람은 C언어나 파이썬 같은 컴퓨터 언어를 잘 다뤄야 한다. 이것은 단기간에 얻어지는 지식이나 기술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어느 회사에서 경력을 충분히 쌓은 사람들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미국에서 이직이 활발한 이유, 이직시장이 이렇게나 큰 이유는 바로 미국 기업들의 transferable skill에 대한 선호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업은 왜 그렇게도 transferable skill을 중시할까?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이직 문화와 관련이 깊다. 어차피 회사 안에 데려와서 내부 시스템을 오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교육을 해봐야 이 사람이 언제 어떻게 회사를 나갈지 모른다. 그러니 내부에서 배워야 하는 지식을 최소한 단순화하고 그 사람이 고용되자마자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transferable skill을 바로 회사에서 충분히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인 것이다. 또 이렇게 transferable skill의 중요성이 강조되다 보니 이직시장이 더 커지는 이런 순환구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신입 사원이 고용되면 긴 신입사원 교육을 받는데 반해, 미국은 제 아무리 이제 학교를 막 졸업한 신입사원이라도 오자마자 바로 실무에 투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처럼 한 회사에 평생 다니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더 선호될 수 있다. 이직을 하고 또 다른 회사에서 적응을 하고 또 때가 되면 이직을 하는 것은 상당히 피곤하며 또 근로자 개인이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이제 회사를 정년까지 다닌다는 신화는 깨졌다.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아니면 나이가 일정 이상이 되어 임원으로 승진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회사를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 결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직이나 더 쉬운 해고가 아니라, 근로자가 조직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역량을 준비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근로자가 조직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역량을 준비할 수 있게 돕는 것. 회사 안에서만 통하는 기술이 아닌, 어디서든 쓰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진짜 ‘근로자를 위한 복지’다.
당신은 지금 transferable skill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지금의 회사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을 자신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