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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위인가, 누가 결정하는가

by 공책

"미국회사는 일반적으로 나이가 큰 상관이 없다."


미국 회사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갖는 생각이다. 정말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실제로 나이가 60대 혹은 70대에 이르는 고령의 엔지니어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상사 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그 상사의 상사조차 더 어린 경우도 종종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일하는데, 왜 한국은 여전히 나이에 집착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중 가장 흔한 해석은 한국의 유교적 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나이에 따라 서열을 정하고, 그에 맞는 예의를 갖추는 전통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있으며,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를 자연스럽게 체화하며 자라왔다.


하지만 정말 외국에서는 상대의 나이를 신경 쓰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꼭 그렇지는 않다. 물론 몇 살 차이로 친구니 형이니 따지는 문화는 없지만, 20살, 30살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에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도 나이에 따른 예의와 배려가 존재한다.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보다 공손하게 대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나이든 사람 역시 젊은 사람의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여유를 갖는 것도 흔한 문화다.


그렇다면, 나이 많은 실무자가 어린 상사 밑에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일할 수 있을까? 핵심은 나이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 조직이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조직에서 의사결정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두 가지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rank-based 방식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 모든 결정권을 갖고, 하위 직원에게 지시를 내리는 구조로, 군대와 같은 조직이 대표적인 예다.


다른 하나는 role-based 방식이다. 특정 업무나 전문적 판단이 필요한 경우, 해당 분야를 가장 잘 아는 실무자나 전문가가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현실의 대부분 조직은 이 두 방식을 혼합해 사용한다. 어떤 사안은 빠른 결정과 실행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급자가 정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어떤 사안은 실무자의 전문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미국 사회는 오랫동안 실무자가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는 문화를 형성해왔다. 이미 유명한 사례로, FDA 공무원이던 프랜시스 켈리가 ‘탈리도마이드’라는 약의 승인을 미루면서 수많은 기형아 출산을 막은 일이 있다. 당시 많은 이들이 그녀의 용기와 통찰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조직의 문화다. 거대한 제약사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실무자인 공무원 한 명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조직이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나이 많은 실무자와 어린 상사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실무자가 의사결정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조직 문화는, 결국 나이와 상관없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만든다. 만약 경험이 부족한 어린 상사가 모든 결정을 내리고 지시만을 하달하는 문화라면, 그것을 오래 버틸 수 있는 고령 실무자도 드물 것이고, 그 조직 또한 결국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Rank-based와 role-based 중 어떤 방식이 더 낫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기술의 전문성이 요구될수록, 해당 분야의 실무자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은 전례 없는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금의 30~40대가 고령층이 되었을 때, 이 인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혹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상사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조직에서 배제한다면, 경제는 장기적으로 침체에 빠질 것이다.


세상은 더욱 빠르게, 복잡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단지 조직 내에서 지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의사결정을 독점한다면, 그 조직은 더 이상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조직은 단순히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지를 따지는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 경험과 지위보다는, 그 순간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진짜 실력이 작동하는 조직이 된다.


이것은 단지 더 나은 기업문화를 만드는 문제만은 아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나이와 직급을 넘어 ‘역할’과 ‘전문성’ 중심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느냐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누가 위인가가 아니라, 누가 결정할 수 있는가를 묻는 사회. 그 질문 앞에 우리가 서 있다.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앞으로 우리 조직과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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