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결정을 순식간에 뚝딱 해버릴 때가 있는가 하면 살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긴 시간 전전긍긍하며 고민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곤 한다. 나는 대학 원서를 쓸 때가 딱 그랬다. 그 시절 나에게 좋은 대학에 가는 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처럼 여겨졌다. 남들이 말해주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내 인생이 시작점부터 잘못되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어떤 대학까지 지원을 해야 할지 부모님과 나는 오랜 다툼을 벌였고 결국 내가 원하는 데로 지원을 했다.
나는 중학생시절부터 물리학자를 꿈꿨다. 만일 고등학교 시절 별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물리학과를 지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는 나보다 잘난 아이들을 너무 많이 만났고 그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전공을 어떻게 정할지 확신이 없었다. 막연하게 수학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수학, 물리와 같은 자연과학을 주로 배웠기 때문에 그런 학과 이외에 다른 학과에 대해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공대에 가야 한다고 권하셨다. 학교와는 다르게 학과에 있어서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데 큰 반대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학교이지 학과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쿨하게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그 많은 공대 학과 중에 무슨 학과를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어떤 학과가 좋을지 한 번도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책을 한 권 사봤다. 공대의 여러 학과에 대해 설명해 둔 책이었는데 아쉽지만 무슨 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책을 보고 전기전자공학과를 진학하겠다고 뚝딱 결정해 버렸는데 이유는 이랬다. 그 책에서 전기전자공학과에 진학하면 마치 고등학생들이 이런 수학들을 배워서 어디에 쓰는지 이유를 알기 어려운 것처럼 어디에 쓰는지 직감적으로 알기 어려운 그런 이론적인 공부를 계속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전기전자공학과에 대해 쓴 부정적인 의견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나를 매료시켰다. 공부를 하지만 이게 대체 무엇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모르는 이론이라니. 나에게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이런 것보다도 나는 그런 추상적인 것을 공부한다는 것이 더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단 몇 시간 만에 뚝딱 정해버린 대학전공으로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물리학자가 되기를 꿈꿨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전기전자공학과에 들어가겠다고 순간적으로 결정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이 결정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에 하나였다. 내가 전기전자공학과에서 대단한 재능을 발휘해서는 물론 아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나는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과정을 다 뚫고 나오자 내가 배운 것들로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내 전공선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내 전공 선택은 나의 결정보다는 내 아버지의 결정이라고 봐야 하지만.
하지만 다른 전공을 택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학을 입학한 지도 16년이 훌쩍 지나고 세상의 변화를 보다 보니 19살 때 다른 전공을 공부했더라면 지금 나의 인생은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특히 내가 통계학과를 갔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당시 통계학과는 어떤 학교의 경우 수학과에 같이 묶여 비슷한 학과로 취급당하기도 했고 특히 내가 졸업한 학교의 경우 이공계가 아닌 문과에 통계학과가 있었다. 때문에 통계학과는 애초에 나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화고 통계학 기반의 AI 기술 수요가 공급을 훨씬 앞지르면서 19살의 내가 통계학과를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은 것이 아쉬워 지곤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취미처럼 수학공부를 했으니 통계학과도 즐기지 않았을까 라는 망상을 하면서 말이다.
돌아보니 전공선택은 나에게 학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내가 더 낮은 순위의 대학에 입학했다면? 내 인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다른 학과를 택했다면? 내 인생은 아주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전공을 선택하는 것만으로 갓 대학에 입학한 나의 삶은 여전히 예측 불허였다. 이제는 정말 현실적인 측면에서 나의 직업을 정해야 했고 전공 분야 안에서도 세부전공을 정해야 했다. 나의 삶을 좌우할 선택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대학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