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교환학생을 지원했다. 만일 교환학생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고 앞으로 해야 할 연구 분야를 찾지 못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른 진로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다닌 대학은 다양한 학교들과 교환 학생 협정을 맺어서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다양한 학교에 교환학생 지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학교들 가운데 미국에서 생활비가 비싸지 않은 지역에 있는 한 주립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공부할 수 있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다양한 학교 리스트를 적어서 제출했고 우연히 한 학교에 배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배정된 학교가 나의 운명을 바꿔버렸다.
그곳에서 나는 미국에서 흔히 ECE, 즉 전기 컴퓨터 공학과라고 불리는 학과의 3, 4학년 전공과목 4개와 운동 수업들을 들었다. 전공과목은 주로 공학 문제 문제풀이 위주이니 영어를 크게 못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고 그 이외 나머지 학점은 운동 과목으로 채웠다. 영어 능력이 많이 필요한 과목들은 아예 신청하지 않은 부족한 영어 실력을 커버하기 위한 나름대로 전략적인 수강신청을 했었다.
미국 대학에서의 첫 주부터 꽤나 충격을 받았는데 이유는 학생들의 적극성과 교수와의 소통 때문이었다. 주로 한국에서는 교수들이 강의를 하고 학생들이 알아서 공부를 하는 시스템에 익숙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학생들이 이것도 모르겠다 저것도 모르겠다 라며 수업 시간 내내 질문을 하는 것도 모자라 수업이 끝나고 그리고 오피스 아워까지 찾아가 교수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도움을 구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던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이런 방식의 공부에 익숙해져서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그렇게 수업 방식이 바뀌자 처음으로 전공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든 찾아가서 도움을 구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편하고 공부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훨씬 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성취감과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교환학생에 와서 그것을 한번 경험하자 마치 갑작스럽게 나의 공부에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은 전력전자와 관련된 수업이었다. 우리가 주위에서 쓰는 전기 에너지는 여러 형태 크기가 있다. 가령 태양열 에너지의 전기 에너지와, 콘센트에서 나오는 전기 에너지와, 배터리에서 나오는 전기 에너지가 다르다. 또한 휴대폰에서 사용되는 전기 에너지, 전기차에서 사용되는 전기 에너지가 다르다. 때문에 필요한 전기 에너지의 형태로 변환시키는 장치가 필요한데 이를 설계하고 구동하는 모든 것을 합쳐서 전력전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전력 전자와 관련된 공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해 보았다. 내가 교환학생을 간 학교는 전력전자 분야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는 학교였기에 양질의 수업이 제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한 학기 교환학생을 와서 그 수업을 듣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과목을 공부하면서 그야말로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찾던 과목이 이것이었다. 전기 에너지, 전기 회로, 반도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한 과목이었다. 작은 반도체 소자 하나를 보고 그것이 어떻게 구동되는지 빠르게 이해하고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회로설계라면 전력전자 엔지니어는 그것이 물리학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지를 아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연구해야 하는 과목이었다. 무엇인가를 보고 오랫동안 고민해 보며 깊이 있는 이해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어울리는 전공이었다. 반도체 하나하나가 어떻게 동작해서 우리가 원하는 전기에너지가 만들어지는지 그것을 그냥 바라보면서 이해하는 것이 좋았다.
전력전자가 매력적이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전기전자공학이라는 과목 안에서 전력전자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었다. 전기전자공학 내에서 한번 자신의 분야를 정하게 되면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려도 상관이 없다. 가령 디지털 설계라는 것을 자신의 분야로 잡게 되면 평생 동안 아날로그 설계나 반도체 소자와 같은 다른 과목들을 접할 일이 없다. 하지만 전력전자는 모든 분야의 지식들을 다 요구하는 측면이 있었다. 전력을 변환하기 위해서는 전력전자라는 과목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회로도 이해해야 하고, 디지털 회로 할 줄 알아야 하며, 코딩에 대한 지식도 필요했다. 나는 무엇이든 묶어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통찰을 찾아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전력전자라는 분야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 배운 모든 전공과목들은 내가 잘할 수 없는 공부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전력전자라는 과목은 달랐다. 비록 학부 3학년 과정의 맛보기에 불과한 과목이었지만 이것만은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교환학생에서 수강했던 전공과목 4개 모두에서 A학점을 받았고 무엇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과목 하나를 찾은 보람을 느끼며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처음으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뿌듯함을 간직한 채로 교환학생이 기간이 끝나고 내가 원래 다니던 학교로 돌아갔다. 놀라왔던 점은 그렇게 한번 자신감이 붙고 나니 돌아온 학교에서의 공부도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움츠리는 것을 그만하고 몸을 크게 벌려 있는 힘을 다해 점프를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자극이었던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대학까지 소위 말하는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드는 명문 학교에서 우수한 교수진들 아래서 뛰어난 동료들 틈에서 경쟁해야 했다. 아주 치열했던 시간들이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치열함은 밤낮없이 공부만 했다는 뜻이 아니라 수많은 좌절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1등을 하면서 앞서 가는 사람은 달리기가 생각보다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위에서 박수를 쳐 주고 성취감을 맛보며 자신만의 페이스로 주위사람들의 응원을 원동력으로 힘차게 달려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뒤에서 쫓아하는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지치고 힘들고 더 이상은 달리지 못할 것 같은데 원동력이 되어주는 무엇인가가 없는데 계속해서 뛰어야 한다. 자신의 페이스도 없이 계속해서 달려야 한다. 대열에서 뒤처져서 아예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또한 찾아온다. 나는 엘리트 교육이라는 달리기 속에서 단 한 번도 앞서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지도 않고 완주를 해냈다. 내 인생 가장 젊고 가장 빛나는 청춘에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이제 더 치열한 경쟁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크게 두렵지 않았다. 무엇이든 잘할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뒤쳐져도 나는 결국 완주해 낼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제일 뒤에서 꼴찌로 따라가더라도 끝까지 대열에서 이탈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점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내가 속한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힘겨운 경쟁과 힘든 공부가 주어졌고 나는 그것이 버겁게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차라리 일반고를 갔었거나 혹은 또 더 낮은 순위의 대학에 가면 조금 더 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졸업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좋은 학교에서 뛰어난 친구들과 공부했다는 것이 행운임을 알게 되었다. 뛰어난 동료들 사이에서 뒤처졌지만 따라가 보려고 노력해 보는 그 기회, 그 기회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스스로를 위한 단련의 기간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