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만난 KBS 동물의 세계와 지하철에서 만난 아프리카 전통복장
어릴 적 TV채널 선택을 향한 나와 외할아버지와의 전쟁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중학교 3학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외할아버지는 뉴스, 신문, 라디오 할 것 없이 당시 노인으로서 접근 가능했던 거의 모든 미디어를 새벽부터 저녁까지 섭렵하셨고 나와 동생은 뽀뽀뽀, TV 만화동산 등 어린이 프로그램에 대한 갈증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외출하거나 주무시거나 하면 나와 동생은 쾌재를 부르며 리모컨을 쥐고 우리가 원하는 세계와 만났다. 외할아버지는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고 우리는 그런 외할아버지가 주무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채널을 바꾸면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 아침뉴스, 정오뉴스, 오후뉴스, 저녁뉴스, 마감뉴스… 남쪽의 작은 섬, 완도에서도 작은 마을 대야리, 대야리에서도 작은 동네 장터마을의 외할아버지는 세상의 뉴스에 늘 눈과 귀를 열었고, 장애와 노화(老化)에 갇힌 그의 정신은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60대 노인과 7살 어린이들의 리모컨 쟁탈전은 가끔 몇몇 프로그램에서 자연스레 휴전 협정을 맺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KBS 동물의 세계였다.
동물들이 일가를 이루어 먹이를 찾고, 다른 일가와 싸워서 영역을 확보하고, 새끼를 낳아 기르는 이야기에 성우들의 재치 넘치는 대사가 어우러진 동물의 세계는 외할아버지와 우리가 함께 시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이었다. 사방이 메마르는 건기, 폭우가 쏟아지는 우기, 어느 시기 하나 동물들에게 쉽지 않았지만 건기가 지나면 메마른 땅은 비로 축복받고 우기가 지나면 푸르른 새싹들로 대지가 풍요로워졌다. 사파리의 이국적인 풍경 앞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었기에 세대 간 차이가 헤집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특히 아프리카의 석양은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과 태양, 단 둘만 존재하는 듯 보였다. 작열하는 태양이 기울며 오렌지 빛깔로 사방이 물들고 땅거미가 지면 지상은 또 다른 종(種)들의 세계가 되어 해가 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됐다.
내 생에 처음으로 만난 아프리카는 TV 속 사파리의 풍경이었고 그곳에는 인간의 빈곤, 성 불평등, 교육 기회 불평등, 사회 인프라 부족 등의 머리 아픈 문제는 없었다. 자유롭게 뛰어노는 동물들, 수많은 동물들을 겁에 떨게 만드는 맹수도 가뭄이나 홍수 앞에선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위대한 대자연 앞에선 어느 누구도 강자라고 할 수 없었다. 어린 나는 아프리카에는 동물만 있다고 생각했고 나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가 헐벗고 가난한 나라라는 편협한 프레임도 학교에 들어간 후에 접하게 됐을 뿐 더러, 아프리카에 그렇게 많은 다양한 나라가 있다는 점도 몰랐던 때였다.
내가 진보적인 학생이었던 건 아니었다. 학내 수많은 학회들과 정치동아리, 학교 밖 수많은 집회들에 기웃거렸지만 그것은 격주, 매월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지 내가 진정 거기에 열의를 갖고 투쟁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중도에서 약간 보수에 기우는 성향이었지만 그런 내 성향에 따른 권익을 주장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공부하거나 학과 친구들과 놀았던 기억보다는 취재를 위해 만났던 KTX 승무원들, 기륭전자 노조원들 포이동 판자촌 사람들, 반전운동 모임 그리고 기타 학내 크고 작은 이슈들에 대한 기억들이 더 많다. 학교 안 세상에서 나는 항상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성향인지 밝혀야하는 순간과 맞닥뜨렸지만 거기에 대해 자신 있게 대응한 적은 없었다. 대신 화자가 내 자신이어야 할 필요 없는 신문이라는 공간에서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 그리고 합의 방향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그건 한쪽의 편에서 주장하는 것보다는 제3자가 되어 양쪽을 살핀 후 이야기 하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덜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차별은 달랐다. 차별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기 때문에 내가 차별 철폐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주장일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차별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확고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다.
학교 총장이 신부 출신으로 제한되는 것에 대한 기사를 내고자 마찬가지로 종교 재단 기반 진보대학으로 분류되는 모 대학에 방문하는 지하철을 탔을 때의 일이다. 문이 열리고 지하철로 들어선 나는 딱 하나 남은 빈자리를 발견했다.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사람들이 대여섯명 됐는데도 아무도 앉지 않았던 그 빈자리. 이윽고 빈자리 옆 남자에게 시선이 향한 후 빈자리가 생긴 연유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프리카 원주민 복장(지금 생각해 보니 마사이 복장)을 한 남자는 문 바로 옆 좌석에 앉아 있었고, 그의 옆 빈자리는 그와 타인 간의 보이지 않은 경계였다. 어깨에 둘러 몸을 감싼 체크무늬 망토, 가죽 샌들, 손에 쥔 나무 지팡이.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앉아 있었고 서 있는 사람들은 내게 "네가 앉을 곳은 저 곳"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잠시 망설였다. '앉을까 말까'. 굳이 여러 사람이 마다한 그 빈자리에 앉을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 남자를 등 뒤로 하고 서 있다가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다른 지하철을 기다렸다.
머리가 다 자라고 난 뒤 믿음과 행(行)함의 모순을 실제로 경험한 그 일을 겪고 나서 어릴 적 꿈꿔왔던 아프리카를 다시금 떠올렸다. 내가 끝내 외면하고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게 만든 그 빈자리에 앉는 것과 아프리카로 향하는 일은 왠지 같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