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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영재 Mar 07. 2022

#22. “여느때보다 빛났던 여행”

Bolivia. Lapaz

고된 등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싶은 생각이 끔찍하게 많이 들었다.

짐을 다 내동댕이치고 욕실로 뛰어가려 했지만 온 다리가 쑤셔서 쩔뚝이며 걸어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에 내 몸을 적시는 순간,

나는 100% 확신했다.

이게 내 인생 최고의 샤워가 될 것이라는 걸...




침대에서 푹 쉬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사람들은 보통 라파즈에 액티비티가 유명해서 오기도 하지만

야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내가 사는 대구는 분지로 주위에 산이 둘러싸여 있는 도시인데

여기 라파즈도 산에 돌러쌓여 있는 작은 도시이다.


대구는 앞산 뒷산 해봤자 30분이면 올라가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긴 앞산 뒷산이 백두산 한라산 느낌이다.

그리고 평평하지가 않고 산을 깎아 집을 만들어낸 듯한 느낌으로

산 꼭대기까지 집이 쫘~아악 펼쳐져있다.

라파즈

그래서 정말 이색적으로 라파즈에서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케이블카이기도 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높은 마을까지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그 불빛들은

감히 홍콩보다 아름다운 야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홍콩은 가보지 않았지만...^^)


그래서 나도 지친 몸을 리프레쉬하기 위해 야경을 보기로 했다.


그날은 뭔가 한국인을 만나 대화를 하고 싶었을까...

혼자가 아닌 동행을 구해서 함께 야경을 보고 싶었다.


주로 여행 에세이 책을 보면 저자들은 동행뿐만 아니라 옷 긴 만 스친 현지인들까지

이름을 외우고,

한국에 돌아가 연락을 하고,

또 그들을 보러 다시 그 나라를 방문하는 경우들이 많아 보였다.


너무 현실적인가...

사실 나는 그런 경우가 별로 없고 스쳐 지나간 정말 행복했던 인연으로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동행도 꽤나 있다...


라파즈에서 만났던 동행도 그랬다.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시고 파티플래너라는 일도 같이 하신다고 하셨던

정말 멋지고 닮고 싶은 분으로만 기억이 난다.


그분과 함께 두 군데 야경을 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간 곳은 대구에 있는 앞산 전망대 또는 서울의 남산타워 느낌이었다.

작은 전망대에 올라서면 라파즈를 전체적으로 쭉 돌아볼 수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내 눈에 들어온 라파즈의 야경은

단연, 내 인생 최고의 야경이었다.

수많은 별들이 춤을 추듯 반짝이는 불빛들로만 가득했다.

너무 아름다운 불빛들을 보며 한동안 멍 때리다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 피곤을 씻어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라파즈 앞산 전망대


이리저리 사진을 찍어대고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두 번째로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마을의 꼭대기로 올라가기로 했다.

사실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굉장히 위험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살짝 겁을 먹고 올라갔다.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 중 라파즈는 마을의 꼭대기로 올라가면 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치안이 많이 좋지 않다는 얘기도 들었었다.


하지만.... 야경을 보기 위해선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보고 싶었기에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섰다.


꼭대기에 올라서서 몇 걸음 걷자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미국의 할렘가를 본 듯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가끔 봤던 그런 풍경보다 더 심각한 풍경이 영화가 아닌 내 눈앞에 펼쳐졌다.


작은 컨테이너 박스가 쭉 이어지고

그 앞엔 작은 벤치와

드럼통에 장작을 태우며 몸을 녹이는 주민들...

라파스 꼭대기 마을


정말 신기하고 새롭긴 했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대로 인생이 끝나 버릴 거 같아

발길을 돌렸다...


다시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케이블카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그 풍경들에

입이 쩍 벌어졌다.

무슨 야경이 이렇게도 아름다운지...

라파스에 빠져들어간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라파즈 야경


그렇게 내려와서 작은 펍에 들어가

소소한 여행 얘기와

소소한 인생 얘기를 하며

라파스의 마지막 밤을

소소하게 마무리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사람들이 가지마라고 하는 곳을 호기심에 찾아가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그곳에 가게 되는 일이 가끔씩 생겨난다.


많은 사람들이 스폿처럼 가는 그런 여행지들도 내 여행의 중요한 순간이지만

가끔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우연히 다 달았을 때,

그리고 정말 현지인들의 삶을 마주했을 때,

그 순간은 내게 더 큰 추억이 되고 오랫동안 내 가슴속에 간직되는 거 같다.


그날 나는 여느 사람들과 같이 아름답기만 한 라파스의 외면만 볼 뻔했지만

우연히 아름다운 외면 속에 진정한 라파스의 내면을 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내면을 볼 수 있는 여행을 조금 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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