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샘!
비 오는 날엔 국수가 괜찮은가요?
그렇게 잔뜩 찌푸리고 짜증만 내던 하늘이 오늘은 시원하게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8월은 우기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비가 안 오는 우기라고 하더라고요. 기후변화 때문인가요? 예전엔 비가 많이 왔다던데 습한 날만 계속되었습니다. 비가 오기 싫어 어지간히도 애쓰는 모양새였습니다. 하늘은 늘 찌푸렸지만, 찌푸린 상태로 밤이 되고 또 아침이 되었습니다. 월간 일기 예보에는 매일 우산이 그려졌는데 비는 8월 한 달 동안 서너 차례 내리는 데 그쳤어요. 그것도 밤에만 내렸지요. 그러니 비를 맞아본 적은 없습니다. ‘우기에 비를 맞지도 보지도 못하다니…….’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러던 오늘, 점심 결에 옆집 양철 지붕이 뚝딱거렸습니다. 그러더니 굵은 빗방울이 벌겋게 녹슨 양철 지붕을 뚫을 것처럼 떨어졌어요. 떨어진 빗방울은 양철 지붕의 골을 따라 흘러내려 개천으로 흘러들었고요. 점점 세차게 내리는 비는 내 방 창문으로 들이쳤어요. 서쪽으로 난 창문을 얼른 닫았습니다. 약간 붉은색 유리 창문으로 비 내리는 것을 멀거니 서서 한참 동안 바라봤습니다. 양철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는 작아질 기미가 없었어요. 창문을 닫으니 이내 습한 기운 방안에 퍼졌고요. 창문엔 습기가 맺혀 밖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쯤 더위에 내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은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로 식히기는 역부족이었죠.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이때 문득 <국수>(백석)가 생각났습니다. 시인은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 볕 속을 지나서 오는 것’이라 했습니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살이워 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묻습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엔 국수지 하며 국수를 삶았습니다. 그 고담 한 맛을 즐겨 보기로 했던 거죠. 한 통에 열 쪽도 넘는 탁구공만 한 마늘 한 통, 진한 자줏빛 껍질을 가진 골프공만 한 양파 두 개를 까서 다지고 잘랐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황태 육수 양념을 넣어 끓이다 계란을 풀어 육수를 만들었습니다, 시인의 말대로 심심한 국물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마 시인이 말했던 고담 한 맛이 이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화구에는 국수 삶을 물을 올리고 다카(Dhaka)에서 사 온 한국산 ‘옛날 국수’를 꺼냈습니다. 10여 인분은 될 양이더라고요, ‘얼마나 삶지’ 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500원짜리 동전만큼 꺼내 끓는 물에 쫙 펼쳐서 넣었습니다. 그러다 좀 더 좀 더 하면서 몇 가닥씩 서너 번을 꺼내 물에 넣었습니다. 국수 삶는 김이 주방 창문에 하얗게 서리고 주방이 온통 김으로 가득 차더라고요. 국수 잔치라도 하듯이요. 시인의 말처럼 마을 잔치를 위해 국수를 삶아낸 듯한 집안 분위기였어요.
삶은 국수는 두 명이 먹어도 될 만큼 많은 양이 되었어요. 시인의 말처럼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라고 커다란 대접에 수북하게 담아냈습니다. 고명으로 잘라서 얼려 놓았던 대파와 한국 산 깨소금, 고춧가루를 얹었으니 근사한 잔치 국수가 완성되더라고요. 후루룩 후루룩 목으로 넘기면서 밖이 보이지 않는 창문을 바라봤습니다. '비 참 잘 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빗소리와 국수 후루룩 거리는 소리가 마치 같은 것처럼 들렸어요. 내가 더 크게 후루룩거리면 비가 더 거세지고 호로록거리면 비가 잦아드는 느낌이어서 재미있었어요. 급기야는 집안에서도 비가 내리더라고요. 머리에서 물방울이 얼굴로 내렸고, 가슴에서 생겨난 물방울은 배로 흐르기 시작한 거죠. 땀이 비 오듯 했으니 집 안팎이 모두 비 내리는 날이네요. 푸짐한 잔치 국수를 한 그릇 마치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죠. 이미 땀 비를 맞았으니 진짜 비를 맞으러 나가자는 생각에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옥상에도 비를 맞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비 피하기를 하면서 살았던 그동안을 생각해 봤습니다. 비를 맞으니 이렇게 시원한데 왜 피하기만 했을까? 비를 맞으니 이렇게 홀가분한데 왜 피할 생각 먼저 할까? 무엇이 두려워 세상일에 부딪치지 않으려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온전히 비에 맞긴 하루였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먹은 국수가 흥성흥성 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