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선생님!
전기가 나가니 이 노래가 생각 나 흥얼거리다 정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정 선생님이 합창 단원이었기에 그런가요.
‘난 이 밤 그댈 잊지 못해 촛불을 켭니다. 내 창가에 예쁜 촛불 그댄 보시나요.’ ‘양하영’ 가수의 노랫말처럼 그리워서 촛불을 켠 것은 아니지만 촛불은 언제나 그리움이요, 운치를 위한 장치가 아닌가요. 촛불 안에서는 왠지 평온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가라앉는 차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촛불 켜는 밤이 종종 생겼습니다. 수도인 다카는 전기가 나가는 일이 드물지만 내가 살던 마이멘싱 지역은 낮에도 밤에도 정전이 종종 됩니다. 특히 여름철이면 전력이 부족해 정전이 자주 발생합니다. 전기가 나가면 처음에는 충전용 전등을 켰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촛불이 더 어울리는 밤일 것 같아 켜기 시작하니 어느새 촛불이 좋아졌습니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불빛도 좋고요. 색색의 초가 내는 빛도 좋습니다. 작은 불빛이 밝히는 방안의 어슴푸레한 밝기도 좋고요. 초가 발산하는 향기도 일품입니다. 주홍 장미의 달큼한 향과 무겁지 않은 라벤더 향이 집안에 가득 퍼져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 여름 망고의 계절엔 망고의 달달함이 있는 노란 향초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처음엔 하나의 촛불이었지만 점점 늘어났죠. 촛불 켜는 밤에서 이제 촛불 잔치를 벌였습니다. ‘바람에 별이 떨어지고 어둠만이 밀려오면’으로 시작해 ‘나의 작은 손에 초 하나 있어 이 밤 불 밝힐 수 있다면 촛불 잔치를 벌여보자’ 던 촛불 잔치를 벌이게 된 거죠. 작은 잔치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촛불잔치를 벌일 수 있는 날이 있을까요?
초는 자신을 태워서 주변을 밝힌다고 하는데 나는 나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다면 그것은 삶이 아니다’라고 한 카뮈의 말처럼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보고요. 이제라도 부드럽고 상큼한, 그리고 시원한 향기를 발산하는 향초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정신 차려 보렵니다.
밤 열 시가 넘어서 다시 전기가 나갔습니다. 밤 날씨가 시원해서 전기가 나가도 문제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켰습니다. 노트북은 전기가 나가든 말든 한국 노래를 계속해서 내보내고 있습니다. 노래 듣는 것밖에 뭔가 할 일이 없어 촛불을 올려놓을 타일 한 조각을 옥상에서 찾아다가 깨끗하게 닦고 촛불을 올려놓았습니다. 촛불의 운치를 느끼려고 가지고 있는 초를 전부 켜서 타일 조각에 올려놓았습니다. 잠시 촛불을 보고 있다가 밋밋한 것 같다 촛불을 내리고 타일에 몇 자 적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것일수록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모르는 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글씨가 적힌 타일에 촛불을 올려놓으니 그럴듯하네요. 주홍 장밋빛을 가진 초는 노랗게 타오르는 불을 아래로 받아들여 밝은 오렌지빛을 시작으로 홍시색으로 변하면서 그러데이션을 이뤘어요. 빨강의 초는 모두 액체로 변하면서 마치 기름 위에 심지를 올려놓은 듯 불빛이 작아졌어요. 보라색 초는 이제 촛농을 다 녹이고 심지를 잃어가면서 붉은 자두 빛으로 또 다른 하나의 보라색 초는 짙은 남색으로 변해갔죠.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의 빛을 잃지 않으려는 듯이 내 움직임에 살짝살짝 움직이면서 아직 살아있음의 신호를 보냈습니다.
초는 불교에서는 성스러운 물건 중 하나라고 합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초가 조상을 기리는 데 사용됐고 소원을 비는 데 쓰였습니다. 한국에서 초가 힘을 발한 건 촛불시위였죠. 그땐 정말 대단한 빛을 발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태워 주위를 밝게 빛낸다는 초가 지금은 자신을 태워 나를 밝혀주고 있고요. 촛불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나 자신이 초가 될 수 있으려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다가 전에 읽었던 촛불 이야기가 생각나 노트북을 찾아봤습니다.
이외수 선생의 <청춘불패>에서 읽었던 건데요.
「어느 날에 밤 초나라 장왕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그런데 한창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돌풍이 불어와 촛불을 모조리 꺼버렸다. 당연히 천지가 암흑으로 휩싸여버렸다. 그런데 어떤 신하가, 간덩이가 부었지, 왕이 총애하는 애첩의 귀를 잡고 입술을 훔쳤다. 애첩은 얼떨결에 그 신하의 갓끈을 잡아떼고 왕에게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러자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 이 자리에서 갓끈을 떼지 않은 자가 있으면 촛불을 켜는 즉시 엄벌에 처할 것이다.」
촛불은 세상의 절망을 몰아낼 수도 있지만 세상을 어둡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전기가 나간 날 흔들리는 촛불에서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