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를 생각해 보면 4남매 키우랴 아빠일을 도우랴 정신없고도 바쁘게 사셨던 것 같다.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었다.
4남매의 도시락을 2개씩 싸고 아빠 도시락까지 쌌다.
엄마가 몇 인분의 쌀을 씻어 밥을 하고 몇 개의 도시락을 씻어야 하는지는 관심 없었다.
식구들 먹고 도시락까지 싸기 위해 어떤 반찬을 얼마나 했는지 그 힘듦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4남매 건사하며 키우는 삶이 아끼지 않고서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철마다 제철 과일이 떨어지지 않게 사주셨다.
그 과일들이 때로는 아삭하지 않고 좀 고들어 있기도 했다.
썩은 것들도 있었지만 동생들과 나는 능숙하게 껍질을 깎고 썩은 부위를 도려냈다.
아삭한 과일은 아삭한 대로, 허벅하고 푸석한 과일은 또 그런 맛대로 맛있게 먹으며 자랐다.
엄마는 긴 겨울을 위해 강정을 두 포대나 했고, 여름엔 수박농사를 짓는 외삼촌이 보내 주시는 수박을 잘 저장해 놓아서 수박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먹성 좋은 우리 사 남매가 좀 컸을 땐 라면을 박스채, 귤을 박스채 샀다.
엄마는 김치의 아삭한 줄기나 간이 삼삼하게 벤 이파리보다 질기고 뻣뻣한 초록색 겉잎이 맛있다고 했다.
그 시절 엄마들이 그랬듯, 우리 엄마도 생선 몸통보다는 생선 대가리가 맛있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입에 고등어가 들어가는 것보다 내입에 고등어가 들어가는 것이 엄마를 더 기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속이 깊은 아이였다.(^^;;)
그래서 프라이팬에 구워진 생선 몸통의 도톰한 부분을 뚝 떼어 입에 넣고 맛있게 먹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생선을 먹을 때 항상 엄마 아빠가 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엄마는 간고등어보다 싱싱한 생물 고등어가 더 비싸다고 했다.
아빠는 간도 안 벤 생물 고등어보다 짭조름한 간 고등어가 더 맛있으니 간고등어가 더 비싸다고 했다.
정작 장을 보는 엄마의 말이 더 정확했을 법한데도 아빠는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빠는 엄마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서도 간고등어를 맛있게 드셨다.
나도 이해 따위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 맛있는 고등어를 더 자주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고등어 대가리에 붙은 살들을 살뜰히 발라 먹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얘기들이 지겹지 않았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엄마는 딱히 식탐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입맛이 없을 땐 맹물에 밥을 말아서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후루룩 먹거나, 김치 한 가지로도 밥을 잘 드셨던 것 같다.
엄마도 기호 같은 것이 있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엄마가 사는 것은 엄마가 좋아하는 것들보단 우리가 먹고 싶어 하는 것들 위주였던 것 같다.
한 번은 그런 엄마가 싱크대 앞에 서서 뭔가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때 엄마는 혼자 맛있는 것을 몰래 먹다 들킨 사람처럼 멋쩍고도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홍시를 맛있게 먹고는 바로 싱크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입을 닦았다.
"나는 홍시를 참 좋아한다"라고 엄마가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그때 엄마가 홍시를 좋아한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가수 나훈아는 홍시를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나도 훙시를 보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가끔 친정을 가면 나는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간다.
우리들 키울 땐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한 번도 원 없이 자신의 기호에 맞게 과일을 드시지 않았을 부모님을 위해서.
P.S. 바로 밑의 동생은 대봉 키우는 감나무집 며느리고, 막냇동생은 사과 과수원집 며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