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확 바뀐 뉴욕 ‘메트’ 유럽 회화관…1960억 원 들여 5년 만에 재개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몇 년째 유럽 갤러리의 이곳저곳을 가린 채 뭔가를 하는 것 같았는데 얼마 전부터는 메트의 심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럽 갤러리 일체의 출입이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메트를 수없이 방문했지만 유럽갤러리에 발조차 들이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 사실 조금 놀란 터였다. ‘얼마나 멋지게 바꿀지 두고 보겠어..’ 라며 발걸음을 돌리던 차. 나의 아쉬움과 원망 섞인 눈초리를 감지한 한 미술관 직원분이 웃으며 “11월에 오세요. 갤러리 천장의 채광창을 교체해서 정말 아름다울 거예요.” 나도 웃으며 그에게 응대했지만 보고 싶던 작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몇 달 후의 재개장에 대한 기대감을 반감시켰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무려 1960억 원을 들인 보수공사였다니. 약간의 기대감이 생겼다.
(왼쪽부터) 그레이트홀, 유럽회화관 입구-, 유럽회화관 내부일부. Photographyed by Claudia Park
메트에는 많은 갤러리가 있지만 자연광이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갤러리는 그리스 로마미술 갤러리와 이집트미술 갤러리의 일부정도만이 있을 뿐이다. 비교적 채광에 영향을 덜 받는 대리석 조각상들이 많은 갤러리들이다. 그런데 회화 갤러리에 채광창을 교체했다고? 어느 정도로? 반신반의하며 메트에 도착했다. 미술관에 들어서 그레이트 홀(Great Hall: 메트의 로비공간)을 지나 지체 없이 2층의 유럽미술 갤러리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갤러리 문을 열면서 처음 든 생각은 확실히 밝아졌다는 것이다. 천장을 보니 반투명 유리창을 통해 인공조명과 자연광이 조화롭게 갤러리를 비추고 있었다.
유럽회화관 내부 일부
샤를 조제프 나투아르 <아담과 이브 The Rebuke of Adam and Eve>, 1740. The MET, Gallery 631
기존에 전시되던 유럽 회화 작품들이 대거 재배치되었고 온라인상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일부 메트 소장품들도 전시되어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이 작품을 꺼냈구나..’ 나만 알던 카페가 알려져 더 이상 비밀스럽지 않게 된 것 마냥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나 또한 직접 이 작품을 볼 수 있어 기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The MET, Gallery 634
좋아하던 작품은 새로운 위치에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마치 큐레이터가 내 마음에 들어갔다 나와 갤러리를 다시 꾸민 듯 흡족했다. 밝아진 갤러리에서 새롭게 재구성된 공간 속 재배치된 작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기존 갤러리의 작품들은 미술사조에 따라 분류되어 르네상스 작품은 이곳, 바로크 작품은 저곳, 풍경화는 저쪽 구석등과 같이 비교적 밋밋하게 전시되어 있었던 반면 재개장한 유럽회화 갤러리는 때론 시대별, 때론 작가별 그리고 때론 미술 사조에 의해 다양하게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흥미진진했다. 특히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메트의 영국회화에 대한 재조명이었다.
영국미술에 뭐가 있지라고 생각해 보면 선뜻 떠오르는 작품이 없을 수도 있다. 그도 당연한 것이 18세기 이전 영국미술은 유럽의 다른 나라 화가, 특히 초상화가들의 손을 빌려 왕실 초상화 정도만을 제작할 뿐 딱히 영국미술이다라고 할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18세기 이전의 작품은 우리가 기억할 만한 혹은 영국의 것이라 내세울 만한 작품이 드물다. 하지만 18세기 런던이 세계 경제와 예술의 중심이 되면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굵직한 영국화가들이 등장한다. 초상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나 왕립화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 –1792)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다음으로는 19세기 영국 풍경화가인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 – 1851)나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정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럽미술의 긴 역사 속에 18세기 영국을 어떻게 끼워넣느냐라는 것이다.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메트는 영국 풍자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1697–1764)의 가족화(conversation Piece)를 이탈리아 회화와 연결 지어 보기로 한 것 같다.
호가스 <스티븐 베킹햄과 메리 콕스의 결혼>, 1729. The MET, Gallery 630
가족화는 일종의 비공식적 초상화로 일상에서 차를 마신다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모습을 초상화의 형태로 그린 회화로 18세기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비록 호가스는 초상화로 유명세를 탄 영국화가는 아니지만 이 시대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임은 틀림없고 때마침 호가스의 가족화를 소장하고 있는 메트는 이 작품을 18세기 영국미술과 유럽회화를 잇는 가교로 활용했다.
페트갈랑트: (좌) 장 밥티스트 파테르 <휴식을 취하는 군대> 1725 (우) <브종의 박람회> 1733. 출처: The MET, Gallery 629
가족화의 뿌리를 찾다 보면 프랑스의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 우아한 복장을 한 상류사회, 특히 프랑스 귀족들이 궁정과 같은 실내가 아닌 야외 풍경 속에서 춤, 대화 등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 회화로 가족화와 마찬가지로 18세기에 흥행함)를 거쳐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파의 전원 목가적 화풍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벨리니, 조르조네 그리고 티치아노로 대표되는 베네치아 화파는 그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한 색채감으로 서정적인 풍경묘사를 이끌어냈고 페트 갈랑트 역시 이런 전원목가적인 화풍의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호가스의 가족화는 페트 갈랑트의 비공식적 사교모임과는 그 성격이 비슷할지언정 베네치아파의 서정성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 과연 어떻게 호가스의 가족화가 이탈리아 회화와 연결이 된 것일까?
(좌) 피에트로 롱기 <만남 The Meeting> 1746 (우) <귀부인 집 방문The Visit> 1746. 출처: The MET, Gallery 630
(좌) 피에트로 롱기 <귀족 집 방문The Temptation> 1746 (우) <편지The Letter> 1746. 출처: The MET, Gallery 630
메트는 호가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베네치아의 풍속화가 피에트로 롱기(Pietro Longhi, 1701 –1785)의 작품을 영국 가족화(English conversation piece)라 소개된 갤러리에 여러 점 전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영국가족화라 이 갤러리를 이름 지어 놓고 실상 가족화라 불릴 만한 작품은 호가스의 그림 딱 한 점뿐인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롱기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베네치아파의 부드러운 서정성을 지니면서도 영국 가족화의 전신이 되기에 이런 그림들 가운데 호가스의 가족화를 함께 전시한 것은 굉장히 유연하면서도 흥미로운 큐레이팅이라고 생각된다.
(좌) 롱기의 작품 (우) 호가스의 가족화
뉴욕에서 영국미술을 전공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다른 유럽미술에 비해 그 관심도가 낮다는 것이었다. 메트와 같은 대형미술관조차 이제야 영국미술에 대한 조명을 본격적으로 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18세기 영국미술에 대한 연구는 곧 전근대미국미술과 밀접관 연관이 있기에 이 시대에 대한 연구는 비록 미국 내에서 대중적인 인기는 없을지언정 미국미술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래서 마치 나와 비슷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는 메트의 새로운 유럽회화관이 그리고 영국 미술 갤러리가 더욱 반갑고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