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니 <법열에 빠진 성 프렌체스코> (1480). The Frick Collection, New York. Image source: Wikipedia.
이탈리아 미술의 목가적 화풍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유명한 작품인 <법열에 빠진 성 프렌체스코 St. Francis in the Desert> (1480)에서 그 압도적인 수준을 드러냅니다. 이 그림은 뉴욕 프릭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의 소장품으로 2023년 10월 기준 프릭 매디슨(Frick Madison)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손과 발에 성흔이 나타난 프란체스코 성인이 경이로움으로 입을 벌린 채 왼쪽 상단으로부터 비치는 금빛 광선 쪽을 향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이런 프란체스코 성인을 감싸고 있는 풍경입니다.
벨리니는 조르조네, 티치아노 그리고 베로네세의 스승 격으로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따뜻하고 풍부한 색채감으로 베네치아파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동시에 종교적인 주제에 목가적 풍경을 접목시켜 종교적이면서 시적인(religious pastoral) 화풍을 선구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화풍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품으로 <법열에 빠진 성 프렌체스코>를 단연코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다양한 성서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성인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당나귀는 겸손과 인내 그리고 동시에 나태함과 완고함을 상징하며 성인의 뒤쪽으로 그려진 동굴은 히에로니무스 성인(St. Jerome)을 상기시킵니다. 그 옆의 독서테이블과 기도서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전원생활을 나타내며 그림의 왼쪽 하단에 보이는 개울과 메마른 나무는 각각 모세의 우물과 불타는 수풀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후경으로는 천상의 예루살렘(Heavenly Jerusalem)이 보입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성서적 요소들은 벨리니 특유의 전원적 풍경묘사와 어우러져 마치 시공간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벨리니 <풍경 속에서 글을 읽는 성 히에로니무스> (1480-5). Image source: National Gallery, London.
이와 유사한 벨리니의 다른 작품을 한번 살펴볼까요?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인 <풍경 속에서 글을 읽는 성 히에로니무스 Saint Jerome reading in a Landscape> 역시 종교적이며 목가적인 벨리니의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은 4세기 후반 라틴어로 성서를 완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림 속 맨발에 흰머리 노인의 모습을 한 성인은 동굴과 절벽으로 고립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성인 주변의 절벽은 후경에 보이는 도시와 대비되며 문명과 단절된 채 오랜 시간 완역본을 집필한 히에로니무스 성인을 풍경적 요소로 잘 표현했다고 평가됩니다.
벨리니 <고뇌하는 그리스도 The Agony in the Garden > (1458-60). Image source: National Gallery, London.
벨리니의 다른 작품인 <고뇌하는 그리스도 The Agony in the Garden> (1458-60)는 그리스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화면을 꽉 채우는 풍경 속 저 멀리 유다가 로마 병사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해 오고 있고 이런 유다의 배반을 이미 예견한 예수가 잠든 3명의 제자를 뒤로한 채 광활한 풍경 속 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이때 인간인 예수의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수준의 풍경묘사 덕분에 이 처절한 성서 속 한 장면이 평화로운 전원의 모습으로 둔갑한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 Allan R. Ruff, Arcadian Vision: Pastoral Influences on Poetry Painting and the Design of Landscape (Oxford: Windgather Pres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