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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된다

<13. 나잇값>

by 타우마제인

화, 상처, 불안, 공포........... 사색으로, 명상으로...... 아 쉽지 않다.


J와 나는 FWB이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난다.

이제 4년 정도 만났다.


나와 성격이 정 반대인 J는 중학교 때 육상선수라 모든 운동을 잘한다.

지금은 취미로 마라톤에 빠져서 매일 20km씩을 달린다고 한다.

상도 꽤 많이 받았다.


한참을 뛰다 보면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오로지 뛰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마라톤이 너무 좋다고 한다.


가식적이지 않고, 언제나 시원시원하고, 솔직한 것이 그 사람의 매력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위선적인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위선적인 사람들의 모습에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위선이 가장 싫은 것 중에 하나가 돼버렸다.

하지만, 내 안에도 위선이 가득하다는 걸 느낀다.

가끔씩은 내 위선에 나도 깜짝 놀라곤 하니까.


반면에 J는 그렇지 않다. 그게 J의 매력인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할 때에는 불안해 하지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활용하며, 열심히 산다.

그렇다. 그는 참 부단히 도 열심히 산다. 역동적이다. 에너지가 넘친다.


가끔 만나는 사이지만, 조금씩 변하는 J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하지만, 어쨌거나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그 사람의 실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돌싱인 J는 아이가 둘이 있다. 아이는 J가 키우지 않고 있다.

J는 결혼 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모든 걸 다 버리고 그 사람 하나만 택했다.

그리고, 버려졌다.


굳이 도덕적인 잣대로 판단하고 싶지 않다.

그건 오롯이 J의 인생이고, J가 짊어지고 갈 부분이다.

그 사실을 들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얘기를 듣고, 술을 꽤 많이 마신 나는 오열했다.

J보다 내가 더 많이 울어 미안했다.


J의 가슴속에 있는 죄책감, 분노, 그리고 끝없이 자책하며 살 J의 미래를 생각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울고 있었다.

보통 우린 전화를 잘하는 사이는 아니다.


서로 각자의 삶을 살다가 가끔 궁금할 때, '뭐 해'라는 짧은 톡을 보내는 사이.


그리고 시간이 되면 만나고 아니면 마는 사이.


난 걱정이 됐다.

그래서 J의 집으로 갔다.

J가 순간적으로 나쁜 판단을 할까 무서웠다.


사람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라, 어떤 가벼운 에피소드만으로도 갑자기 죽고 사는 문제로 치환될 수 있다.


나는 그걸 잘 안다.

경험자이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좋은 일엔 달려가지 않아도, 힘든 일엔 달려가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잘 못 되기라도 한다면, 그건 내 잘못이다.

매일매일 무너지고 있는 인간은 무조건 도와야 한다.

나도 매일매일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상이 행복한 것임을 우리는 이럴 때만 눈치챈다.


30대 후반의 J는 나이 먹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잊히는 게 불안한 것 같았다.


날씬하고, 미인이고, 자신을 잘 가꾸는 J는 항상 인기가 많았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그 사람에게 버려진 이후부터 데이트하는 상대들에게 돌싱이라는 이유로

몇 번 거절을 당하자 덜컥 겁이 나고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J의 불안을 잠재우고자 차인 것에 대해 농담 식으로 장난을 쳤다.

그러자 화가 났는지, 화살을 나로 돌려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 나이에 차도 없다는 둥, 어떤 얘기를 하면 허세 떨지 말라는 둥, 너나 나나 똑같은 처지니까 둘이 이러고 있다는 둥의 말들. 본인은 똑똑하고 안정적인 사람 만나고 싶다는 말들.

그리고, 돈이 없어 보이는 내 행색에 대한 돌려 까기 식의 비난이 마구 쏟아졌다.

술이 과해서인지 결국엔 '나잇값'을 좀 하고 살라는 말까지 보탰다.


젠장 서러웠다. 걱정돼서 밤에 이 먼 곳까지 택시 타고 왔더니만, 욕만 바가지로 먹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잔칫상을 들이밀어도 내가 안 먹으면 그만이니, 상대방이 나에 대한 비방을 해도

그 말을 흘려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난 동요됐고 아직도 J의 비난이 가슴을 때리고 있다.


다음 날 나는 나잇값이란 단어를 마음에 지닌 채 집으로 갔다.


그런 말을 한 J가 특별히 밉진 않다.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나잇값...... 나잇값이라.....


며칠 째 이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실패가 더 많았던 삶이지만, 분발하고 있었는데.....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나도 안다.

내 나이라면 대출은 있지만, 20-30평대 아파트에 차에 일정한 수입이 있으면 일단 J가 말하는 나잇값은 하고 있는 거겠지.

과거에 내가 지녔던 것들이 지금은 없기 때문에 난 지금 나잇값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J덕분에 오랜만에 니체의 책을 다시 읽었다.

이것도 허세일까. 철학이 좋으면 허세일까. 마라톤을 좋아하면 허세가 아닐까.

이건 누가 판단하는 걸까.


누구나 현재의 매일을 나잇값을 하며 살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실패는 이제 지겹다.


별다른 결론은 없다. 그렇다고 갑자기 없던 돈과 아파트와 차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이럴 때엔 명상도, 어떤 정신승리도 대체가 안 된다.


그냥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상처받은 허영심 때문에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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