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
부자다, 명망 있는 집안이다. 그냥 평범한 집안이다, 가난한 집안이다.
인생은 벌써 여기서부터 결정이 나버린다.
바람둥이 남편을 둔 엄마는 매일 일을 했다.
나 역시 아빠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인상적인 기억 몇 가지를 얘기해 보겠다.
첫 번째 인상적인 일은
내가 4-5살 때 인가, 일하느라 맡긴 동생은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옆집에 맡긴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계획된 건지, 아니면 그냥 잃어버린 건지, 나는 아직도 묻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안다.)
결국, 동생은 미국으로 입양됐다.
20대 이후에 동생을 찾아보자고 엄마에게 말을 한 적이 있다.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냥 예의상 한 말 일 수도 있다.
동생이 미국으로 입양 간 건 우리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유야무야 지나가 버렸다.
찾아서 한국에 와봤자, 부자이지 않은 이상,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일에서 나는 평생의 상처로 남을 말을 듣게 된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동생을 다시는 못 본다는 생각에 나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엄마가 작게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다
‘G(남동생)가 가는 게 아니라 네가 갔어야 하는 건데.’
엄마는 나보다 남동생 G를 더 좋아했었다.
두 번째 인상적인 일이다.
한 내가 6살 정도였던 것 같다.
의정부의 어느 한적한 길가. 읍에서 벗어난 양쪽이 공터로 뒤덮인 도로.
그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자전거를 탄 고등학생 오빠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난 무서워서 얼른 쭈그리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순간, 영화같이 내 위로 붕 떠서 올라가는 자전거.
그 후의 일은 너무 무서워서 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 이후, 난 내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고 영원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란 다짐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찰과상일 확률이 높지만, 이런 생각을 하기에 6살 때의 난 너무 여렸고, 게다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이 두 가지의 일들이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가난은 유년의 기억에 여러 가지 안 좋은 에피소드들을 무한대로 양산한다.
집 나간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 엄마 친구의 남편 호적에 입적된 것.
(호주제 폐지 전의 일이니까)
아빠의 본처는 따로 있어, 한때 그 집에 들어갔다가 첫째 언니에게 온갖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한 기억.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지만, 하루 종일 손들고 벌을 서거나, 뜨거운 목욕탕 안에서 못 나오게 했던 것. 굶긴 기억 등등)
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여기저기 이웃이나 엄마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게 된 것.
그리고, 성폭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잘한 성추행 등등....
그래도 인간은 본능대로 살아간다.
어린 내가 막을 수 있었던 일이 한 가지라도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