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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탐정 유강인 19_09_붉은 원의 정체

탐정 유강인 19편_검은 판사, 악의 분노

by woodolee

윤이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중년 여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윤이슬은 말했다. 불타는 다락방 커피숍에서 백미 노인의 제자가 되겠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면 … 사랑했던 남자친구 이동호의 칼에 맞거나, 연기에 질식돼 죽을 게 뻔했다.


중년 여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난 십자매다. 네 엄마와 나는 백미 노인의 동문 제자로 스승님을 충실히 따랐다.

수많은 제자 중에서 단연 으뜸은 네 엄마, 황금새였다. 그래서 스승님이 네 엄마를 제일 아끼셨다. 말 그대로 수제자였지.”


“엄마가 스승님 수제자였다고요?”


“응, 타고난 손기술 기술과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수술을 참 잘했지.”


“네? 수술이라고요?”


“응, 수술이지. 황금새는 스승님의 뒤를 잇는 성형 수술의 신이었어.”


“네에? 뭐라고요?”


윤이슬이 깜짝 놀랐다. 앞에 있는 십자매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엄마, 정연지는 의사가 아니었다.


십자매의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엄마는 사업가 겸 보험설계사였는데 난데없이 성형 수술의 신이 튀어나왔다.


윤이슬이 급히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엄마가 성형 수술하다니 … 엄마는 의사가 아니에요!”


“얘야. 꼭 면허가 있어야 수술하는 건 아니란다.”


“네에?”


윤이슬이 그 소리를 듣고 뒷걸음질 쳤다.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구보다 손재주가 좋은 엄마가 웃고 있었다.


엄마가 섬세하고 가는 손가락으로 길고 뾰족한 바늘을 들었다.


“헉!”


윤이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엄마한테는 남모를 비밀이 있었다. 그 비밀을 유일한 가족인 딸한테도 철저히 감췄다.


엄마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점점 머릿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렇게 엄마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 엄마의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범해 보였던 엄마는 대단한 현금 부자였다. 건실한 사업체를 운영한 거로 드러났다. 죽기 전 사업체를 정리하고 현금 300억을 확보했다.


그 300억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십자매가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유령 의사다.”


“유령 의사라고요?”


“그렇다. 그 시초는 스승님이셨다. 전문 유령 의사로 명성을 떨치셨다.

우리는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날개를 펼쳤다. 그렇게 큰돈을 벌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자세한 건 스승님이 직접 말씀하실 거다.”


윤이슬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싶어도 아래턱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렇게 잠시 얼어붙었다.


그녀에게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폭풍처럼 그녀를 덮쳤다.


십자매가 한 손을 들고 집 안을 가리켰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이슬이 겨우 정신 차렸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사방을 살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집 안이 눈부시게 빛났다.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찬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카락이 격하게 요동쳤다.


십자매가 힘을 주어 말했다.


“금학아,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넌 갈 데가 없어. 다른 곳으로 가면 … 살 수가 없어. 네 엄마처럼.”


“사, 살 수가 없다고요? 엄마처럼 ….”


윤이슬이 두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떴다. 엄마가 죽고 이제 혼자 남았다. 엄마처럼 죽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깊은 밤 정적이었다.


윤이슬이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침을 꿀컥 삼키더니 활짝 열린 현관문 안을 유심히 살폈다.


찬란한 빛이 거실을 밝혔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그 영롱한 빛을 마음껏 발했다.


십자매가 미소를 짓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윤이슬도 결심을 한 듯 걸음을 옮겼다.


두 손으로 가슴팍을 꼭 부여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칠흑 같은 어둠이 끝나고 찬란한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커다란 거실이었다. 작은 호텔 로비 같았다.


거실 한 가운데 커다란 소파가 있었다. 그 소파에 백미 노인이 편히 앉아 있었다.


백미 노인이 윤이슬을 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소파 앞에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최고급 위스키병과 술잔이 있었다.


백미 노인이 술잔을 들어서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꿀꺽꿀꺽 술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에서 울려 퍼졌다.


십자매가 윤이슬에게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금학아. 어서 자리에 앉아. 스승님 말씀을 잘 들어.”


윤이슬이 윗입술과 아랫입술에 침을 묻혔다. 그렇게 긴장감을 달래고 소파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윤이슬이 자리에 앉자, 백미 노인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잠시 고개를 푹 숙이고 뜸을 들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금학아. 네 엄마, 황금새가 죽은 건 정말 미안하다. 내가 막을 수가 없었어.

총명했던 황금새가 교활한 살모사 놈한테 이용만 당하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어. 그걸 막아야 했는데 … 한발 늦고 말았어. 젠장!”


“살모사!”


살모사라는 말에 윤이슬이 남자친구 이동호를 떠올렸다. 다락방 커피숍에서 백미 노인이 말했었다. 이동호에게 호통을 쳤다. 살모사가 그리 시켰냐고 따져 물었다.


윤이슬이 급히 입을 열었다.


“살모사라고요? 살모사가 대체 뭐죠?”


백미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살모사는 … 붉은 원의 일원이었다. 냉혹한 놈이지. 살인을 저지르는 암살자다.”


붉은 원이라는 말에 윤이슬이 화들짝 놀랐다. 붉은 원은 엄마가 죽기 전, 남은 힘을 다해 그린 그림이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이 붉은 원과 관련된 거 같았다.


“붉은 원은 ….”


백미 노인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잠시 윤이슬의 두 눈을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자책하는 목소리였다.


“붉은 원은 내가 만든 조직이다. 유령 의사 집단이지.”


“유, 유령 의사 집단이라고요?”


백미 노인이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응, 그렇다. 젊은 시절, 난 미국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비밀리에 성형 수술을 배웠다. 그 수술은 불법이었다. 면허 없는 자가 수술을 하는 유령 수술이었다.

나에겐 스승님이 있었다. 그분한테 모든 것을 배웠다. 스승님은 신이 내린 얼굴을 만드는 분이셨다. 세계적인 미인이 스승님 손에서 탄생했다.

스승님 가르침 덕분에 나도 유명해져 많은 돈을 벌었다. 그렇게 한참 잘 나갈 때 스승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붉은 원을 만들었다.”


백미 노인이 위스키 잔을 다시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가 말을 이었다.


“붉은 원을 창립했을 때 고작 열 명뿐이었다. 하지만 일감은 넘쳤지. 내 실력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내 손으로 수많은 미남 미녀를 만들었다.

그렇게 붉은 원을 만들고 유령 의사로 10년 동안 활동했다.

현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제자들을 길렀다. 바로 네 엄마, 황금새가 내 제자였다. 그것도 수제자였지.”


오늘 밤 붉은 원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유령 수술 집단이었다.


윤이슬이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의 진짜 정체를 알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백미 노인이 한 손으로 동그라미를 천천히 그리며 말했다.


“붉은 원은 … 피로 그린 원을 뜻한다. 붉은 피는 수술하면서 흘리는 생명수다. 원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을 상징한다.

완벽한 원이 바로 완벽한 미인이다. 바로 신이 내린 얼굴이지.

생명수인 피를 철철 흘리며 만드는 이상적인 미인, 그것이 바로 붉은 원, 레드 서클(Red Circle)이다.”


“세상에!”


윤이슬이 붉은 원의 뜻을 깨닫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엄마가 마지막 순간에 그렸던 붉은 원, 하얀 시트에 붉은 피로 그린 붉은 원이 떠올랐다.


백미 노인이 수제자를 그리워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정말 대단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솜씨를 선보였다. 당대 최고의 얼굴이 네 엄마 손에서 탄생했다.

이는 한국만이 아니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에서도 네 엄마를 찾았다.

그렇게 황금새가 황금알을 낳았다. 자유로운 새가 되어 하늘을 훨훨 날았다.”


“아!”


윤이슬이 탄성을 내지르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엄마가 사줬던 명품 옷과 맛있는 음식, 놀이동산, 초호화 호텔 등이 떠올랐다. 이 모든 것들이 유령 수술의 대가였다.


백미 노인이 술병을 들었다. 술을 잔에다 콸콸 따랐다. 술이 잔에서 넘쳐 흐르자, 한 손으로 잔을 꽉 잡았다.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자, 내 의도와 달리 붉은 원이 변질됐다.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고의 성형 수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조직이었다. 불법이지만, 일에 보람이 있었다. 고객이 만족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런데 이에 만족하지 못한 놈들이 암살자로 변모했다. 피 맛을 보더니 더 많은 욕심에 취했다.”


백미 노인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두 눈에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살모사가 바로 그자다. 그자도 나의 제자였다. 매우 뛰어난 제자였지. 황금새가 나타나기 전까지 살모사가 최고의 실력자였다. 황금새가 등장하면서 그 실력이 뒤로 밀리고 말았다.

그 이후 살모사가 황금새를 시기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윤이슬이 급히 말했다. 그 일은 엄마의 죽음과 관련된 게 분명했다.


“그 일이 뭐죠?”


거액으로 네 엄마를 꼬드겨 노하우를 챙기더니 … 네 엄마를 해쳤다.

네 엄마는 너를 위해 은퇴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를 살모사한테 넘겼다.

불법 수술을 그만두고 너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는데 살모사가 네 엄마를 죽이고 말았다.

최고의 기술을 확보하자, 네 엄마가 쓸모없어진 거지. 눈엣가시 같은 경쟁자를 제거하고 싶었겠지.”


“네에?”


윤이슬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미 노인이 한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외쳤다.


“난,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네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

지금 살모사는 내가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유령 수술뿐만 아니라 살인 청부업까지 하면서 엄청나게 성장했다.

스승인 나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네 엄마의 노하우까지 확보했으니 앞으로 더 활개 칠 게 뻔하다.

그자가 네 엄마를 죽인 것도 모자라 너까지 죽이려 했다. 네 남자친구 이동호는 … 살모사의 부하다.”


“오, 오빠가 살모사의 부하라고요?”


백미 노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동호는 잘생긴 얼굴로 너를 유혹했다. 아주 교활하고 야비한 놈이지.

살모사 그놈이 아주 독하게 마음먹고 어미뿐만 아니라 새끼까지 죽이려 했다. 황금새의 실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딸까지 죽이려고 마음먹었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저는 수술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무슨 실력이 있다는 거죠?”


백미 노인이 윤이슬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엄마가 말했었다. 이슬이 재능이 자기보다 더 뛰어나다고 … 어릴 적부터 은밀히 교육했는데 정말 잘 따라왔다고 말했다. 손기술뿐만 아니라 미적 감각도 더 좋다고 감탄했었다.

하지만 자기처럼 유령 의사가 되기를 원치 않았어. 엄마는 돈 때문에 유령 의사가 됐지만, 딸은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기를 바랐어.

그게 바로 … 엄마의 마음이지.”


“네에?”


윤이슬이 매우 놀란 나머지 미동조차 못 했다. 엄마가 앞에 보였다. 엄마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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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자. 이렇게 해봐.”


“엄마, 이렇게요?”


“그래, 우리 이슬이가 엄마를 닮아서 참 잘하는구나!”


“정말이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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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바늘을 들고 자수를 가르쳐 주던 때가 떠올랐다. 그리고 찰흙으로 피규어를 만들며 놀았던 때도 떠올랐다.


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엄마가 놀란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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