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명호는 신우에게 여자가 생긴 것만 같아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뒤를 몰래 밟았다.
신우가 빵집에 들어가자, 밖에서 상황을 살폈고 5분 후 처자 둘이 빵집 안으로 들어가자, 이때가 기회다 싶어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빵집에 들어온 명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신우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 신우 아니 철호야! 네가 여기 웬일이냐?”
명호가 신우의 가명인 철호를 불렀다.
신우는 갑자기 등장한 명호가 철호라는 가명을 부르자, 급하게 허탈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허허허! … 명호야. 난 신우잖아. 철호는 우리 개 이름이잖아.”
신우가 명호를 반기며 눈치를 줬다.
“철호가 개 이름이라고?”
신우의 말에 명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상황을 눈치채고 능청스럽게 둘러대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제가 신우를 가끔가다가 철호라고 부른답니다. 개처럼 귀엽게 생겼잖아요. 하하하!”
명호가 말을 마치고 손뼉을 짝 쳤다. 그리고 신우 앞에 있는 두 여인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한 명은 대단한 미인이네, 옆에 있는 사람은 토끼처럼 아주 귀엽고.’
명호가 자기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신우 친구 정명호입니다. 신우랑 약속이 있으신가 보네요, 흐흐흐!”
명호가 능청스럽게 연기를 이어갔다.
“전 빵을 사러 왔는데 아주 우연히 여러분을 뵙게 됐네요. 하하하!”
기분이 꽤 좋은 듯 명호가 고개를 젖히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신우 옆자리에 착 앉았다.
‘명호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
신우가 이를 악물었다. 명호가 뒤를 밟은 거 같아 기분이 몹시 상했다. 하지만 그걸 여기에서 따질 수는 없었다. 그도 명호처럼 능청스럽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 이거 참 우연이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신우도 억지 연기하며 명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속으로는 집에 가서 두고 보자며 화를 참았다. 그가 명호에게 귓속말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일본 사람들이니까 … 조심해.”
“일본 사람들이라고?”
신우의 말에 명호가 깜짝 놀랐다. 그가 잠시 신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칭 본의 아니게 합석한 명호가 입을 열자, 네 명이 곧 웃음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옛날, 동네 수다쟁이로 명성이 자자했던 명호답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었다.
사업하면서 익힌 일본어와 한국어를 골고루 섞어가면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맛있는 빵과 고소한 우유를 먹으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에리카가 가게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이 벌써 30분이나 지났다. 이제 신우와 오붓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이에 요시코의 넓적다리를 살짝 꼬집었다.
“아야! … 풋!”
요시코가 단팥빵을 맛있게 먹다가 한 손으로 입을 꼭 막았다. 그리고 에리카의 눈치를 살폈다. 에리카가 이제 가보라는 듯 고개를 문 쪽으로 살짝 돌렸다.
요시코가 언니의 마음을 곧 헤아렸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 참, 제가 할 일이 있는데 … 그만 깜박하고 있었네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요시코가 신우에게 꾸벅 인사했다. 먹고 있던 빵을 들고 가게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눈치 없이 능청맞은 얼굴로 실실거리며 앉아있는 명호를 보고 고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명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당돌하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도 … 무슨 일 없으세요?”
“난, 별일이 없는데 … 왜요?”
명호가 무심결에 답하고 요시코의 얼굴을 쳐다봤다. 순간! 무섭게 째려보는 요시코의 눈빛에 헉! 하며 움츠러들었다.
그가 급히 상황을 파악했다. 신우와 에리카의 표정이 탐탁지 않은 걸 보고 그도 요시코처럼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맞아. 나도 할 일이 있었지. … 그럼 가봐야겠네.”
명호가 남은 빵을 입에 집어넣고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잔을 깨끗이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우와 에리카에게 작별 인사하고 요시코와 함께 가게 밖으로 나갔다.
둘은 처음 보는 사이라 어색했다. 아까는 넷이 같이 있었지만, 지금은 둘밖에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봄날이었다. 여인의 가슴이 어느 때보다 요동치는 싱그러운 봄날이었다.
명호와 요시코가 같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별말이 없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뭔가가 있었다. 자석의 이끌림과 같았다. 양극과 음극이 만나자, 거부할 수 없는 당김이 있었다.
명호가 요시코의 얼굴을 힐긋 훔쳐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 일본인인 요시코가 못 알아들을 거 같았다.
“참! 토기처럼 귀엽게 생겼네!”
명호가 말을 마치자마자, 요시코가 고개를 명호 쪽으로 획 돌리고 말했다.
“뭐라고요? 토끼!”
“어?”
명호가 깜짝 놀랐다. 요시코가 자기 말을 다 알아듣자,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아저씨! 제가 토끼처럼 생겼다고요?”
요시코가 명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따지듯이 물었다.
잠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명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아들었어요? 한국말을 정말 잘하시네요. 한국에 오랫동안 사셨나 보네요.”
명호가 혀를 내둘렀다.
“그야 당연하죠. 전 한국 사람이니까요.”
요시코가 당당하게 답했다.
요시코의 답에 명호가 다시 한번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네? … 아까 옆에 있던 아가씨랑 자매라고 하지 않았나요? 언니 동생이라고 분명히 들었는데 …. 언니는 일본인이고 영어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요시코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저 앞에 있는 먼 산을 바라봤다. 그녀가 답했다. 담담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 에리카 언니랑은 의자매 사이에요. 언니는 일본 사람이고 전 한국 사람이에요. 원래 저는 언니네 수양딸이었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아! 그렇구나. 그럼 일본 이름이 요시코란 말이고 … 한국 이름은 뭐죠?”
요시코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에 명호가 급히 말했다. 동질감을 느끼고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요시코가 한국 이름을 담담하게 말했다.
“제 진짜 이름은 옥희예요. 차옥희!”
“아! 옥희! 정말 이쁜 이름이네요! 토끼처럼 귀여운 이름이에요.”
명호가 요시코의 진짜 이름을 듣고 반가움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저씨는 이름이 정명호라고 했죠?”
“맞아요. 정명호입니다. 제 이름은 정명호예요.”
둘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자, 사이가 더욱 가까워진 거 같았다. 비록 둘은 나이 차가 꽤 났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거 같지 않았다. 화기애애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다정하게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요일인지라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거리를 따라 심은 벚꽃 나무에서 흰 벚꽃이 만발했다. 마치 함박눈이 온 듯 세상이 환했다. 하늘도 경성의 봄날을 즐기는지 더욱 높고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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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와 에리카가 빵집을 나와 근처에 있는 창경원으로 향했다.
창경원의 원래 이름은 창경궁이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동-식물원이 만들어지면서 창경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젠 왕궁이 아니라 경성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변모했다.
창경원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화사한 벚꽃을 즐기며 식물원에서 자라는 이국적인 식물과 동물원의 호랑이, 사자, 코끼리를 보며 즐거워했다.
에리카는 오랜만에 창경원에 들렀다. 그동안 학교 수업에 매진하느라 올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하아!”
그녀가 신이 났는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공원을 돌아다녔다.
신우는 에리카를 따라다니며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거대하고 괴이한 식물들과 말로만 들었던 호랑이, 사자를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다.
그는 오늘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에리카처럼 신이 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중압감에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리카에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한동안 신나게 공원을 돌아다니던 에리카가 다리가 아픈지 종아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만 쉬죠. 저기에 벤치가 있어요.”
신우의 말에 에리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둘이 작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날이 너무 좋아요!”
에리카의 음성이 높았다. 기분이 들떠서 그런지 솜사탕 같은 목소리였다.
“그렇죠.”
신우도 하늘을 쳐다보며 덤덤히 답했다.
“응?”
에리카가 급히 신우의 안색을 살폈다. 기분이 들뜬 자기와 달리 무덤덤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곧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저 … 혹시 무슨 걱정 있으세요?”
에리카가 신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그게 아니고요.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나서요. 별일 아닙니다.”
신우가 애써 태연한척하며 멋쩍게 웃었다.
신우가 웃자, 에리카가 속으로 안도했다. 자기하고 같이 있는 게 싫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했다. 분위기 전환도 할 겸, 주변에서 간식거리를 찾았다.
마침 솜사탕을 파는 행상이 보였다.
에리카는 어릴 적부터 솜사탕을 좋아했다. 아빠가 사 준 솜사탕의 향긋한 향기와 달콤한 맛에 흠뻑 빠져서 정신없이 먹던 때가 떠올랐다. 그날을 회상하며 빙그레 웃었다.
“신우씨, 솜사탕 먹고 싶지 않아요?”
에리카가 속으로 군침을 삼키며 신우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 예, 좋아요”
신우는 솜사탕이 뭔지도 몰랐지만,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시는 에리카의 말에 바로 수긍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에리카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솜사탕을 파는 행상을 향해 뛰어갔다. 마치 어린 소녀처럼 신이 나는지 솜사탕을 빨리 만들어 달라고 졸라댔다.
잠시 후, 행상한테서 큼지막한 솜사탕 두 개를 받은 에리카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신우를 찾았다. 그때 두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신우가 벤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에서 검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벤치에 누운 신우가 가슴이 아픈지 가슴을 꽉 부여잡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다 벤치에서 속절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가슴에서 검은빛이 계속 뿜어져 나오더니 몸을 휘감았다.
“악!”
에리카가 신우의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솜사탕을 집어 던지고 그에게 급히 달려갔다.
22년간 괴롭혔던 고통이 다시 찾아왔는지 신우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고통의 강도가 엄청난 거 같았다.
“이를 어째!!”
에리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겨우 정신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며 제발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제발 도와주세요. 사람이 아파요. 제발!”
많은 사람이 신우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신우를 내려다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제발 도와주세요!”
에리카의 간곡한 외침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신우의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의 단추와 허리띠도 풀었다. 그늘진 곳으로 신우를 옮겼다.
“휴우~!”
한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던 신우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고통이 가셨는지 이제 정신 차렸다.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모두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보였다. 바로 에리카였다.
에리카의 얼굴에는 수정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뜨거운 눈물이 허공을 가르더니 신우의 얼굴에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