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저는 의사입니다. 이분은 당장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습니다.”
신우를 도운 남자가 말했다. 신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듯 낯빛이 어두웠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리카가 답을 하고 신우를 부축했다. 신우는 고통에서 회복한 듯 얼굴빛이 점점 편안해졌다.
둘이 창경원 정문으로 향했다.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가기로 했다.
창경원 정문 앞에서 신우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에리카를 보며 말했다.
“지금은 … 괜찮아졌어요. 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요.”
에리카가 정색하고 답했다.
“아니에요! 몸이 정상이 아니에요. 아까 몸에서 검은빛이 감돌았어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빛이었어요. 너무나도 불길했어요. 숨이 넘어가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에리카가 몸을 떨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신우를 떠올리며 몸을 마구 떨었다. 그때 신우를 감싸던 검은빛이 그를 괴롭히는 거 같았다. 그녀가 택시를 부르고 신우에게 말했다.
“근처 병원이 아니라 경성에서 가장 큰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아요.”
“가장 큰 병원이라고요?”
“네! 가장 유명하고 실력 좋은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5분 후 택시가 도착했다. 둘이 택시를 타고 경성에서 가장 큰 병원인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신우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엑스레이를 비롯한 여러 검사를 받았다.
잠시 후 에리카가 진찰실에 들어갔다. 환자 보호자 신분이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 갔다.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담당 의사가 에리카에게 말했다.
“환자분하고 무슨 사이죠”
의사의 말에 에리카가 당황한 듯 곧장 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수줍은 표정으로 답했다.
“제 남자친구예요.”
의사가 고개를 끄떡이고 말을 이었다.
“환자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엑스레이 감사 결과, 가슴뼈 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이 있습니다. 등에 큰 흉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등을 관통해서 가슴뼈까지 도달한 것 같습니다.
그 물질은 외관상 돌덩어리 같습니다. 큰 덩어리 주변으로 작은 돌가루들이 사방으로 퍼져 있습니다. 눈 쪽에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서 신우의 상태를 설명했다.
“네?”
의사의 말에 에리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급히 말했다. 무척 떨리는 목소리였다.
“혹 … 생명에 지장이 있는 건가요?”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사실 치명적인 상태인데. 환자분이 저렇게 멀쩡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 상태라면 돌아다니기는커녕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다른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습니다. 굉장히 건강한 상태입니다.
현재 환자분 상태는 괜찮지만, 통증을 유발하는 이물질이라면 안심할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큰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의사의 말에 에리카의 두 눈이 켜졌다. 큰일이 생길 수 있다는 말에 어서 빨리 신우를 괴롭히는 이물질을 빼내고 싶었다. 이에 간곡히 의사에게 말했다.
“그 물질을 … 제거할 수 있나요?”
의사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현재 의학기술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물질이 심장과 폐 등 주요 장기에 착 달라붙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저도 궁금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에 사망했을 겁니다. 환자분 몸이 아주 특별한 거 같습니다.”
“수술은 어렵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수술했다가 장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발작 증세를 잘 조절하는 수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에 에리카가 낙담하고 말았다.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밀려오는 슬픔을 참으며 질문을 이었다. 신우의 몸을 감쌌던, 그 불길한 검은빛을 알고 싶었다.
“선생님, 사람이 아프면 몸에서 검은빛이 발산할 수도 있나요?”
“피부에 푸른 멍이나 검은 점 정도는 생길 수 있지만, 검은빛이 난다고요?
사람이 어떻게 빛을 발산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건 전등이나 가능한 일이죠.”
의사가 위에 있는 전등을 가리키며 에리카의 말을 일축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에리카가 진찰실에서 나왔다. 무척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잠시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신우가 누워있는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침대에 누워있던 신우가 몸을 일으켰다.
에리카가 떨리는 눈망울로 신우를 쳐다봤다. 처음으로 멋있는 남자를 만났는데 남자의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가슴 안에 커다란 돌덩이가 있었다. 그 돌덩이 때문에 큰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았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신우에게 물었다.
“혹,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신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병원까지 온 이상,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답했다.
“그게 … 사실, 22년 전에 큰 사고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가슴에 통증이 있었고요. 그 통증을 안고 여태까지 살아왔습니다.”
신우가 말을 마치고 침상의 이불을 꽉 잡았다. 비참한 신세를 에리카에게 말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뭐, 뭐라고요? 진작 말했어야죠. 난 그것도 모르고 … 혼자 신이 났잖아요.”
에리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신우가 고개를 다시 떨구고 답했다.
“신우씨!”
에리카가 신우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신우 옆에 앉았다. 신우의 한 손을 살포시 잡더니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다시 아프지 않아요?”
순간, 신우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에리카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몸에 닿자,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신우는 너무나도 지쳤었다. 복수하기 위해 22년을 참고 또 참았다. 그런 신우에게 에리카의 숨결과 체온이 피로 회복제와 같았다. 신우의 지친 마음을 달래기 시작했다.
신우가 행복한 듯 입을 반쯤 벌렸다. 에리카의 꽃다운 향기와 따뜻한 온기에 취할 것만 같았다.
“어서 자세히 말해줘요.”
에리카가 신우의 손을 꼭 잡고 재촉했다. 마법에 걸린 듯 신우가 그간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고를 당한 후, 통증이 주기적으로 찾아왔어요. 힘을 쓰면 심했고, 힘을 쓰지 않아도 간혹가다 아팠어요.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더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심하게 아팠어요.”
“아! 그랬군요.”
“그러다 기적적으로 눈을 뜬 후로는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는데 … 최근에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 도진 것 같아요.”
마음 상하는 일은 바로 촌장과 마석을 만난 일이었다.
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촌장의 비참한 죽음과 마석의 통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의사 선생님이 당부하셨어요. 화를 내면 안 된다고 …. 지금 가슴 쪽에 문제가 있대요. 화를 내면 분명 심장에 좋지 않을 거라고 … 발작이 다시 생길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에리카가 말을 마치고 신우의 왼쪽 가슴에 오른쪽 손바닥 살며시 댔다.
신우가 빙그레 웃었다. 에리카의 손을 잡고 답했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에리카가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신우도 같이 웃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에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눈이 먼 이후 명호만이 자기를 이해하고 돌봐줬는데, 경성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이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 같아 가슴이 어느 때보다 설렜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둘이 병원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에리카가 신우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신우의 집 앞까지 따라와 전화번호와 집 주소까지 받았다. 푹 쉬라는 말과 함께 다음 약속까지 잡고 집으로 향했다.
잠시 에리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우가 한 손으로 가슴을 만졌다. 다행히 전혀 아프지 않았다.
에리카가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신우가 집 현관문을 열었다. 안방으로 들어가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는 에리카의 휴일을 망친 것 같아 내심 미안했다.
석 달 전에 눈을 뜬 이후로 가슴이 아프지 않아서 ‘이젠 고통에서 해방됐구나!’ 하며 안심하고 있었는데 오늘 다시 고통이 재발하고 말았다.
신우는 언제 발작할지 모르는 고통에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22년 만에 만난 촌장이 죽던 날, 가슴에 뭔가가 얹힌 거 같았다. 뭔가가 탁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촌장의 허무한 죽음과 뻔뻔한 마석, 드러난 진실이 신우의 가슴에 큰 응어리를 심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무리 심한 고통이 닥치더라도, 그 고통이 안겨주는 불안감이 태산처럼 클지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에 힘을 내기로 했다. 22년간 기다린 복수와 에리카, 둘 다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저녁 무렵이 지나도 명호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네.”
신우가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늦는 명호가 참 이상했다.
분명 명호는 빵집에서 신우보다 먼저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신우의 얼굴에 불안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명호가 혹 순사한테 잡힌 게 아닐까?’
신우의 입안이 바짝 말라 갔다.
한편, 에리카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동생인 요시코한테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동생 품에서 놀란 가슴과 커다란 슬픔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녀 수장인 나나코가 놀라운 말을 했다.
“아가씨, 요시코는 아직도 외출 중입니다.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아가씨를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입니다. 아가씨를 내팽개치고 놀러 가다니 … 본때를 보여주겠습니다.”
“아직도 요시코가 돌아오지 않았다고요? 이게 대체?”
에리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시코는 분명 빵집에서 먼저 나갔다.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여태까지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에리카는 동생의 귀가 시간이 늦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이에 신우 걱정뿐만 아니라 요시코 걱정에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방안을 계속 서성였다.
1시간 후,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왔나?”
에리카가 창문으로 달려가 누가 들어오는지 확인했다. 요시코였다. 그녀가 돌아왔다.
“요시코!”
에리카가 기쁜 나머지 방에서 뛰쳐나와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현관문이 활짝 열리고 요시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아가씨, 왜 이렇게 뛰어오세요?”
요시코가 에리카를 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이제 들어와!”
에리카가 화난 표정으로 요시코에게 한소리 했다.
“아! … 그게, 크큭.”
요시코가 즐거운 일이 있는 듯, 한 손으로 입을 꼭 막고 웃음을 참았다.
“어, 수상하네?”
에리카가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요시코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 동생의 손을 잡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때 나나코가 나타났다. 그녀가 뿔이 잔뜩 난 표정으로 요시코를 노려봤다.
에리카가 급히 말했다.
“나나코, 내가 요시코한테 심부름시켰어. 차비를 소매치기당해서 걸어왔대. 그러니 혼내지 마.”
“아! 그런 건가요?”
에리카의 말에 나나코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비가 없어서 걸어온 걸 탓할 수는 없었다.
에리카가 방문을 꼭 닫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며 요시코에게 따져 물었다.
“왜 이리 늦었어? 걱정했잖아!”
“저, 그게 명호씨가 저녁 먹자고 해서. 헤헤헤!”
“뭐? 명호 씨라고? … 신우씨 친구를 말하는 거야?”
요시코가 갑자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늦은 이유를 털어놨다.
그녀는 명호와 계속 같이 있었다. 점심으로 평양냉면을 먹고 영화도 보고 청요릿집에 가서 저녁도 같이 먹었다고 자랑하듯이 말했다.
“뭐, 뭐라고?”
요시코의 말에 에리카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에리카는 남자친구가 갑자기 아파서 노심초사했는데 요시코는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온종일 놀다가 돌아왔다.
“언니, 그만 가볼게요. 오늘 좀 피곤해서요.”
요시코가 콧소리를 내면서 방문으로 향했다. 오늘 명호와의 만남이 참 즐거웠던 거 같았다.
어느 때보다 얄미운 동생의 뒷모습이었다.
에리카가 기가 막힌 듯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동생한테 위로받으려 했는데 오히려 화만 돋우고 말았다.
“세상에나! … 저 여우. 뭐, 연애 도사가 아니라고? 어디에서 거짓말을!”
에리카가 요시코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동생이 괘씸한 거 같았다. 그러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무탈하게 집에 돌아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명호는 신우의 친구였다. 신우의 친구인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날이 어두웠다. 에리카가 창문으로 가서 달을 찾았다. 반달이 보였다. 반쪽짜리 달이었다. 그녀가 반달을 보면서 생각했다.
“신우씨를 괴롭히는 돌덩어리를 가슴에서 빼내야 하는데 이를 어떻게 빼내지?”
에리카가 고민에 빠졌다. 신우만을 생각하며 그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었다.